Drawing & Erasing 긋기와 지우기

CHOI BYUNG SO

2014-06-11 ~ 2014-07-11

최병소 - 어둠의 어조語調

무엇이 그의 작업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가. 무엇이 종이(신문지)를 펴놓은 책상으로부터 그를 물러서지 못하게 하는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손에 든 펜(볼펜)과 연필(흑연)을 놓지 못하게 하는가. 이렇게 물음을 던지면서 우리는 그의 작업이 우리 모두를 끌어 들이는 어떤 위험을 예감하게 된다. 그 위험에 다가설 때 우리는 예술에 관해 무언가를 배우게 되리라.

그런데 그의 작업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작가의 예술적 집념이나 투지와는 무관하다. 그의 작업이 그의 말대로 “목적도 없고 달성해야 할 것도 없는” 것이라면 도대체 그에게 있어서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에 이르고 무엇을 이룬다기보다는 나아가면서도 자꾸만 미끄러지며 제자리를 맴도는 그의 작업을 보며 우리는 의혹에 잠긴다. 그린다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과는 까마득한 것이 아닐까하고.
오랜 작업으로 헤지고, 찢어지고, 심지어 까맣게 타버린 듯한 종이에서 상처로 남은 작가의 비장함을 읽는다는 것은 자칫 우리의 안이한 낭만적 대리만족일 수 있다. 수십 년을 지리하지만치 한결같은 어조로 종이를 채우면서도 그는 어디에 이르고자 한 적도, 무엇을 이루고자 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수고로 까맣게 채운 종이가 무위無爲로 까맣게 비어있다. 채움과 비움. 그에게 있어서 그리기와 지우기는 원래가 하나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채움과 비움의 수사修辭로 완성되는 정신의 초연함을 말하기에는, 그는 종이와 연필이 나누는, 결실을 모르는 못난 사랑과도 같은, 알뜰한 구속으로부터 잠시도 손을 떼지 못한다. 아끼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알뜰함이 몰두와 몰입에 대한 최상의 정의定義는 아닐까. 우리가 종이와 연필이 나누는 알뜰한 구속을 말했듯이, 그에게 있어서 그린다는 것은 어떤 높이에 이르거나 어떤 깊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알뜰한 구속을 따르며, 심지어 무모하다는 핀잔마저 감수하며 나아가야 하는, 하지만 아무 것도 드러내지 못하는, 이를테면 끝날 수 없는 것의 발견과도 같다.
그린다는 것이 끝날 수 없는 것의 발견이라 할 때, 이곳에 끌려든 작가는 자신을 넘어 보편이나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모두를 향해 얼굴을 치켜든 멋지고 훌륭한 그림을 희망하지 않는다. 차마 기억이나 개성에의 미련마저 쑥스러운 듯 그는 자신의 작품에 날짜도 서명도 남기지 않는다.
날짜도 서명도 없는 작품. 그에게 있어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날짜 없는 시간에, 이름 없는 작가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지금 여기의 알뜰한 구속을 따라 나선 그는, 끝날 수 없는 것의 유혹에 이끌려 날짜 없는 ‘시간의 부재’ 속으로 들어선다. 우스개인양 절망인양 그림을 그린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시간의 부재 속으로 들어선다. 기억을 모르는 시간, 개성의 확인을 허락하지 않는 시간, 그 시간의 부재 속으로 들어선 그는 더 이상 연필의 주인일 수가 없다. 그는 이미 서명을 남길 수 없는 이름 없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우리는 이 말의 지향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한 개성으로서 이름을 지닌 작가가 발음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침묵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는 작품이 있는 곳을 모른다. 그에게 있어서 작품이란 자신의 능력의 보증인양 작업을 해나갈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는 결코 작품을 염두에 두고서, 엄청난 수고를 작정하고서 연필을 손에 들지 않는다. 시간의 부재 속으로 들어선 그는 그의 의지로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는, 새로운 시작이 아무것도 새롭게 할 수 없는, 연필을 들려고 하는 순간 이미 연필을 들고 있는 그로 되돌아와 있는, 그래서 끝내 작업을 멈추지 못하는 그이다.
그렇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린다는 그 알뜰한 구속을 따르는 일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그것은 이미 그의 능력도, 권한도 아니다. 능력을 포기하고 권한을 거절하고 들어선, 마치 타버린 재와도 같은 소멸과 삭제의 지점에서도 여전히 시작도 끝도 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는, 더 이상 그가 아니다. 그는 이미 어느 누구가 아니다. 그린다는 것, 그것은 마침내 작가 스스로가 멈춰지지 않는 그리기의 말없는 메아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메아리가 되기 위해서 그는 작가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미술의 모든 표현가능성에 대해 침묵해야 했다.
실제로 그림을 그리면서 그는 그의 그림 속에서 아무 것도 알아보지 못한다. 색에도, 질감에도, 선에도, 필치에도, 화면의 균형에도, 그 무엇에도 그는 무지하다. 무지. 그러나 오해는 말자. 그는 결코 미술의 모든 표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침묵할 따름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실제로 그림의 슬기로운 표현 가능성들이 말없이 흩어지고 뿌려진 채 묻혀있다. 다만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현대 미술이 잊고 있었던 예술의 의미에 관한 한 훌륭한 증언을 만난다. 미술의 또 다른 가능성은 부정을 통한, 의미의 부정을 통한 무의미로의 비상飛上이 아니다. 너의 부정이 나라면, 그 때의 나는 너무 옹졸하지 않은가. 오히려 의미가 다하고 소진되어 더 이상 말하지 못할 때, 그 침묵마저 긍정할 때, 아무 것도 긍정하지 못하는 긍정이라 하여도 그 끝나지 않는 것을 긍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무의미를 만난다. 모든 표현 가능성에 침묵하고서 벼랑에 선 미술을, 그 벼랑에서 그 기원을 되묻는 미술을 만나는 것처럼.
지금 여기서 그는 여전히 그리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그가, 연필과 종이가 서로에게 몸을 내어주어 함께 닳으며 들려주는 간단없는 메아리에 귀 기울일 때, 지금(NOW) 여기(HERE)는 이미 그 어느 곳도 아닌 곳(NOWHERE)으로 물러선다. 하지만 그 어느 곳도 아닌 곳은 그럼에도 여기이다. 여기가 아무것도 드러내주지 못하고 다만 끝나지 않는 것의 긍정에 불과하더라도.

아무 것도 드러내지 못하는 그의 작품은 여기 어둠에 잠겨있다. 그의 작품은 그렇게 시간의 부재를 물들이는 어둠의 어조마냥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어둠에 매몰되지 않는다. 오히려 소멸되기 위해 기울인 알뜰하면서도 무모한 노력으로 놀랍도록 빛나고 있다. 재처럼 무한의 어둠으로 사라지면서도 말없이 빛나는 부동의 광물처럼. 여기서 작품이 그 이상을 드러내주기를 바라는 자는 아무 것도 찾지 못하고, 그리고 그것이 아무 것도 드러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의 작품을 배반하면서 이해 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그의 작품 앞에서 오해를 숨기며 불안스레 서성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달승(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