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ltra-marine

KIM TSCHOON SU

2015-04-10 ~ 2015-05-10

金春洙: 靑의淡畵

[1] 김춘수의 예술가로서의 문제의식
그가 예술가로건, 과학자로건, 교사로서건, . . . 모든 진지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그를 진지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 있는 데, 그것은 아마도 그만의 문제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010년도 김춘수 개인전 도록 에세이에서, 저자 박세연에 의하면, 김춘수는 젊은 20-30대부터 지금까지 관통하는 예술가로서의 문제의식이 있었는데, 그것은 서양회회작가로서 그의 가장 중요한 마티에인 캔바스에 대한 것이었다. 비어 있는 캔바스에서 화가는 시작하여 붓으로 색채를 입혀서 그 평평한 공간를 그림으로든 무엇으로 채우는 것이, 화가가 하는 예술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이 캔바스를 어떻게 간주하여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가 곧 김춘수의 문제의식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것은 모든 회화작가의 공통된 고민임에 틀림없다. 그것을 창문으로 간주하면 작가와 외부세계와의 인터훼이스 디바이스의 일종이되고, 과연 그 창문은 “인간이 세계에 합일되고자 하는 꿈”을 가능하게 할 것인가? 박세연은 그래서 김춘수의 “창(窓)작업은 아직은 이전 작업에서 카메라의 시야가 드러내는 개념공간으로서의 선처럼 창이라는 구조적 장치로 하여금 행위의 상태가 맴도는 자기 지시적 단계에 놓여있었으며 동시에 작가는 재료가 묻혀진 상태가 드러내는, 동사로서의 그리기의 지점에 대한 자세로 본격 이행하려한다” 고 보았다.
사실, 창으로서의 화가의 캔바스가 외부의 세계를 직접으로는 커녕 재현적으로도 동일하게 담을 수 없다는 것은 캔바스라의 주어진 존재론적인 조건 (ontological condition) 때문이다. 왜? 캔바스는 평평하고, 외부세계는 그렇지 않으니까. 그래서 평평한 공간 위에 눈 속임의 기술들을 동원하여 외부세계와 유사한 깊이와 볼륨과 색감을 그대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의 경주가 유구한 서구회화의 역사라고 본다면, 사진 기술이 발명되어 발전되면서, 사진은 재현적 회화보다 훨씬 더 유사하게, 훨씬 더 쉽게 기계적으로 외부세계를 재현하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재현적 회화로서의 미래는 없다고 새로운 회화의 예술적 방향을 찾으려 한 것이 서구 繪畵史에서의 현대성의 고민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콜롬비아대학의 몇 년 전에 작고한 Arthur Danto는 서구회화사는 현대주의 회화라는 이름으로 회화의 가장 순수한 상태 (‘its purest state’)를 지향하는 그림을 추구 하다 보니 단색화, 미니멀리즘을 통하여 회화의 종말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김춘수가 사진이라는 매체까지 이용하여 회화작가로서 문제의식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작품창작과정에서 전개하였었다는 데, 사실은 사진이나 영상이라는 매체로 회화처럼 외부세계와의 합일은 커녕 유사한 진실성에 가까운 재현조차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하바드대학의 스탠리 카벨 교수가 그의 역저인 영상의 존재론(World Viewed: Ontology of Film) 에서 제시하듯이 영상매체의 존재론적인 조건 때문이다. 즉, 원래 스크린이란 영어로 SCREEN이란 단어는 무엇을 빛을 막아주는, 또는 모기 같은 나쁜 놈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방충망 같은 것으로 그것을 쳐놓으면 그것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우리'는 밖의 다른 사람들한테는 보이지 않는 장치를 말한다. 동사로는 그런 스크린을 쳐서 막아주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스크린을 동사로 쓸때는,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 주는 것의 의미도 있다. 하바드철학과의 터줏대감으로 아마도 20세기 후반부에 최고의 예술철학자요 언어철학자였던 스탠리 카벨 박사는 그의 저서 '영상의 존재론'에서 스크린을 그런 의미로 해석한다. 그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는 '우리'는 그 밖의 넓은 삶의 현장인 세상으로부터 스크린 되어 격리되었다는 말이다. 사실 그것이 스틸 사진 카메라건 영상용 비디오나 필름카메라건 상관 없이, 모든 행위는 세상을 스크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기술적으로 사진은 세계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을 담을 수 밖에 없다. 그 사진이 담은 장면 밖으로 전개되는 세상을 짤라 버리고, 그 사진은 그 사진의 후레임 안에 들어오는 것만 보여준다. 스크린이라는 영어 단어는 동사로서 '막는다'는 의미 이외에도 뽑다 선택 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예를 들면 'We screend the applicants'라는 문장에서, 여러 원서 낸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만 뽑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스크린드 (즉, 막았다)는 것이 된다. 그러니, 그 사진의 사각형 또는 직사각형 후레임 안에 들어오지 않는 다른 세상은 모두 막고 안 보이게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사진으로 그 한 순간의 그 한 장면의 자연이나 세상을 보여주는 것은 존재론적으로는 이런 의미가 있다. 즉, 그 사진에 담겨진 세계에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be present' 되었지만, 그 사진 속의 세계는 우리에게 'be present' 되어있지 않다는 말이다. 이게 왜 중요한 관계 항 일가? 세상(the world)는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역동적이다. 항상 어떤 사건이 전개되고 있고, 나름대로의 생동감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항상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즉 세상은 '우리'에게 'be present'되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진상으로 또는 영상물상으로 그 역동적인 세상의 대부분을 가로막고 작가가 선택한 조그만 부분만 보이게 하고, 또 그것도 '우리'에게만 보여지는 것이고, 그 사진 속의 장면 자체 또는 그 사진의 장면 내에 있는 다른 인간이나 동물은 우리를 의식하지 못하는 그래서 우리와 눈을 맞추고 대화를 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닌 것이라면 이런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면 될 가? 카벨은 이런 종류의 관람행위를 voyeurism에 비교한다. 즉, 사진 이미지나 영화나 비디오를 보는 것은 우리가 작은 구멍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 사생활의 장면을 훔쳐보며 스릴을 느끼는 그런 행위에 비교한다. '우리'가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풍경의 주인공들은 의식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든, 중요한 것은 영상물은 아무리 긴 것이라도, 궁극적으로는 아주 조그만 시간적 단편만을 보여줄 수 있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조그만 사건을 담은 영상은 그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더 큰 시간적, 사회적, 역사적 콘텍스트로부터 짤라 내어 진 상태의 즉 스크린드된 상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캔바스가 외부로의 창문으로서건 재현적 스크린(그것이 회화적이건 영상, 비디오, 사진적이건)으로서건 외부세계와의 어떤 종류의 합일의 인터훼이스 디바이스로의 역할은 불충분함을 다른 모든 서구의 현대회화작가나 다른 예술가들처럼 김춘수는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2]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외부세계로서가 아니라 내면세계와의 합일의 꿈을 꿀 수 있게는 할 수 있을 가? 즉 이번에는 캔바스를 내명세계의 창으로 간주해보자는 것이다. 사실, 추상표현주의나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그런 식으로 캔바스를 간주하여 여러 가지의 회화 사조가 20세기에 나타났다. 더 올라가면,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는 관객들한테서 그들의 내재된 미적 감각에 호소하여 그들 내면에서 부터의 감정이나 느낌의 호응을 끌어내려고 하지 않았나. 좀더 가깝게는 화가의 캔바스는 화가의 표현의 장(site)로 간주되어 동시에 행동(액션)의 장(場)으로 그리는 행위를 그대로 보여주려고 하였다. 어쩌면, 이들이 김춘수 회화의 성격에 가장 가깝게 보일 수도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한 때를 풍미한 추상표현주의라는 또는 액션페인팅이라는 이름의 뉴욕스타일은 그 ‘all-over’ 스타일 하나만으로도 김춘수의 회화와 방법상의 유사함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잭슨 폴록(Jackson Pollack)의 추상 표현주의의 관련 컨텍스트 속의 ‘액션’페인팅과 김춘수의 그림은 조금만 깊이 있게 사유하면, 같은 종류의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더니스트 아트 평론가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 는 잭슨 폴록의 ‘all-over’페인팅은 그가 캔버스의 경계들 내부로부터의 모든 구상주의적인 흔적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용한 장치 혹은 테크닉이라고 평했다. 또, 프리드의 평 속에서 잭슨 폴록은 캔버스의 모든 ㎟ 까지 채우는 노력을 통해 그림 속에서 공간적 깊이를 읽는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시키면서, 이렇게 하여 완전히 평평한 평면, 자기가 선택한 재료인 캔버스의 평평함과 완벽하게 평행을 이룰 수 있게 화면을 구성했다. 그것은 하나의 형식적 장치(formal device)였다. 이것은 바로 해롤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가 이른바 ‘액션 페인팅’이라 칭한 종잡을 수 없는 변화(disruptive development)에서 그가 눈치 채지 못한 부분이다. 여기서 그의 ‘action’이란 그 당시 프랑스에서 매우 유행했던 ‘실존주의’의 포스트 2차 세계대전 버전에서 기인했으며, 그 속에서 개인은 어떤 명분에서건 도덕적 혹은 정치적 헌신을 형성해 온갖 열정을 끌어 모아 실행했었다. 사르트르(J.P. Sartre)가 옹호했던 것은 2차 세계 대전 이후라는 시대 속에서 현대(당신 서구의 의미) 남녀에게는 피할 수 없었던 실존의 문제였던 ‘허무주의(Nihilism)을 극복하기 위한 것일 뿐 다시 말해, 그에게 그것은 페스트 혹은 다른 유사한 끔찍한 전염병처럼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정신을 감염시켰던 어떤 역사적인 분위기였다.
어떤 행위(Act)를 한다는 것은 그 행위자의 will(의지)가 작용하며 그리하여 사람은 도적적, 정치적 또는 미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것의 실행의 결과에 대해서는 상관없이 온 마음을 다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로젠버그도 그림을 그리는 행위 그 자체에 중점을 두었고 완성된 작품을 신체적인 매너훼스테션(manifestation) 즉, 실제 작업 뒤 생기는 일종의 잔여물로 보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포스트2차 세계 대전 서구 사회의 실존주의는 단지 지나가는 유행과 같은 철학적 표현이었지 그것은 당시 시대의 허무주의적 분위기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어떤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사르트르가 말한)에 대한 이류(2流)짜리 이해라는 것이다. 뉴욕 스타일의 추상 표현주의 회화에 대한 해롤드 로젠버그식의 해석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는 액션의 무대인 캔버스 위에서의 그림 그리는 행위에 중점을 두었고 다시 말하면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 중에 취한 행위가 특히, 캔버스의 바운더리(boundary)를 처리하는 점에서 어떻게 궁극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지가 중요한 것이었다.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그 순수한 행위일 뿐 결과는 단지 그의 회화행위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거기에는 전시회를 열고 작품을 예술시장에 내놓고 판매해 예술가로서의 삶을 꾸리기에는 무성의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했다. 그들을 아트_잉(Art-ing) – ‘예술을 하다’는 의미의 내가 만든 조어–의 개념에서 본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적 웰빙을 위해 다른 가능한 정신적 활동중의 뭔가를 해야 했던 것이다. 예술가가 실제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 단지, 자신 개인의 정신적 활동 혹은 마스터베이션의 잔여물에 불과한 것을 미술시장에 내놓는 다는 것은 이미 기만이 아닌가?
어떻든, 형식주의적 개념의 ‘all-overness’건, 로젠버그 스타일의 액션 페인팅의 올오버적 방식이건 어쨌거나 김춘수의 그림은 그런 종류의 ‘all-over’ 작품은 아니다. 김춘수의 ‘all-overness’는 ‘paint-acting’의 방식을 통해 이뤄진 것도, 모든 재현주의(representationalism)적 흔적들의 환각법(illusionism)을 형식적으로 거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얻어진 것도 아니다. 아마도 김춘수의 회화방식에도 결과적으로는 잭슨 폴록의 ‘all-overness’와 같은 형식이 보일 수도 있으나 그것이 결코 김춘수 작품의 미학적 주요소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모두 재현주의적 흔적들이 제거되어있는 평면이며, 작가의 의도치 않은 부산물인 작품이라 해도 그의 ‘그림 그리는 행위’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익숙한) Mindscape를 탈 영역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다른 mindscape, 세잔느의 경우에서처럼 다른 미적 정서를 지닌 어떤 대안적 mindscape를 그리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mindscape 류가 아닌 김춘수의 회화 작품은 도대체 무엇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담담함(淡淡함) 또는 명상(溟想)이 바로 그 답이다. 다음 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겠다.

[3] 담(淡)의 명상(冥想)이 곧 마인드 스크린의 탈(脫)영역화(領域化) 작업
마음을 비운다는 것. 우선 그것은 비우는 것이 아니라 가라앉혀서 담담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형성하는 내면적인 풍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마음의 스크린을 과격하게 재구성해야 한다. 부연 설명하자면,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내재(hard-wired)된 노움.촘스키가 말하는 Universal Grammar의 지식이나 또 다른 인간의 human nature와 관련된 잠재적 potentiality나 propensity와 함께 태어나면서부터 배우는 여러 가지의 언어, 습관, 지식, 이론, 욕망, 편견, 여러 다른 텍스춰의 감정. . . 등등의 숱하게 많은 다른 소픝웨를 인스톨하여, 그 모든 소프트웨의 집합에 해당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외부로부터 부여 받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라고나 할 가.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깨어 있는 매 순간에 바쁘게 작동하고 있는 그런 여러 종류의 소프트웨어들의 작동을 잠시 내려놓는 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식 禪(Zen)에서 말하는 절대 空이란 개념적으로 무의미한 (즉 있을 수 없는) 말 장난에 불과하다. 왜? 모든 소프트웨어가 비워지면, 그 캄퓨터는 재 부팅이 불가능하고, 그것은 바로 그 개체의 죽음을 말한다.) 진정한 명상의 상태에 들어간 禪의 상태는 공의 상태가 아니고 우리는 그것이 바로 담담한 마음의 상태라고 생각한다. 담담한 마음의 상태란 바로 마음의 여러 상념을 잠시 접고 또는 내려놓고, 차분하게 객관적으로 자신을 돌아 볼 수 있어, 자신의 참 모습을 자신의 참의 정체성(眞我)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담담한 마음의 상태를 줄여서 담의 상태라고 부를 것이다. 또는 담의 정신! 그리고 이렇게 담담하게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mind-screen의 탈영역화라고 부를 것이다.
원래 탈영역화라는 개념은 질스 들뢰즈(Deleuze)와 구타리(Guttari)의 천 개의 고원:자본주의와 정신분열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혹은 들뢰즈의 감각론(Logic of Sensation)에서 인용된 유명한 용어이다. 들뢰즈는 서구철학자들 중엔 보기 드물게 스탠다드한 서구의 미학과 예술의 이론적 체계를 벗어나 어떤 대안을 모색하고자 진지한 노력을 했던 사람이다. ‘deterritorializaton’ 과 ‘defacialization’은 들뢰즈가 세잔(Cezanne)의 풍경화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왜곡된 인간상을 담은 그림에 대해, 그들의 작품 속의 풍경이나 신체들은 각각 새로운 예술적 개념과 미학의 싹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 그의 직관적 신념을 바탕으로, 급진적인 재해석을 시도한 노력에서 사용한 중요한 두 가지 용어이다. 다시 부연하여, 조경건축의 예를 들자면, 여기서의 조경은 자연에 대한 인위적인 배열 또는 ‘땅’이나 ‘자연’을 이미 정의된 일단의 범주와 분류양식에 따라 조성하는 것을 말한다. 자연의 일부인 땅을 주택개발이나 공원부지, 또는 농경지 등으로 구획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조경은 땅의 일정부분에 대한 체계적인 공간 조성을 의미하며 얼굴은 머리를 감싸고 있는 신체 부위의 세계적인 공간조성을 의미한다. 이때 머리는 신체의 맨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부학적으로 볼 때 신체의 일부가 된다. 들뢰즈와 과따리의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땅은 조경을 통해 영역화된 것이다. 영토화란 국극적으로 미래의 시각적 인지를 위한 이지적 여과장치 역할을 하게 되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문화정치적으로 조성된 분류체계를 이루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마찬가지로 얼굴은 사회외부로부터의 압력 또는 유혹에 의한 표정화(facialization)라는 전제적(fascistic) 계층구조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의 정체성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실망하게 된다. 그래서, 세잔느는 익숙하게 보는 풍경에 대한 탈영토화를, 베이컨의 경우에는 얼굴표정이나 육체(바디)표정(모습?)의 탈영토화를 통해 숨겨진 그래서 위선적인 진 모습에 가까워지기 위해, 익숙한 얼굴이나 신체의 표정을 기이(奇異)시킨다던지 괴물화 시키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은 무엇이고, 그것에 가까이 가기 위한 예술은 어떻게 새롭게 태어나야 될 가? 새로운 예술철학의 실마리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지만 ‘deterritorialization’과 같은 개념들로는, 물론 어느 정도는 유용하긴 하지만, 김춘수나 그의 동료 담화 작가 들한테는 그런 과격한 탈영토화의 제스춰가 불필요하다. 동양의 옛 예술정신 속에는 서구현대미술에서 고민하는 문제, 이슈들을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다른 철학으로 해결하고, 바로 그런 해결책이 있으므로, 그런 동양적 예술성의 추구는 완연히 다른 예술철학과 미학을 전제한다. 그래서, 미래의 세계화된 국제 미술 아니 국제 예술 (그것이 국제 음악이건 문학이건)은 궁극적으로는 허무주의와 자해의 예술의 막다른 골목으로 뿐 갈 곳이 없는 서구식 현대예술의 대안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동양적 마인드 스트린의 탈영토화로서의 김춘수나 다른 담화 작가들의 예술작업의 전제 조건인 마음을 가라앉히는 즉 담의 조건은 무엇인가?

[4] 담(淡)의 조건
먼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眞我를 즉 그만의 결을 찾아야 하는 데, 인간의 경우에는 연꽃의 씨앗 같은 그만의 결을 확보해 주는 DNA의 구조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일 가? 그의 육체적인 특성이야 그가 어떤 종류의 질병에 약한 가 등의 정보까지 유전적 특성으로 설명되겠지만, 그의 성품, 그다운 독특한 영혼의 소유자로서의 眞我는 그의 뇌의 구조나 유전적 특상만으로 설명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0세기 후반에 가장 주요한 인지과학적 발견은 인간의 언어능력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노움 촘스키의 이론일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은 Innate Knowledge of Universal Grammar를 hard-wire되어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Innate Knowledge는 물리학에서의 Potential Force같은 것이어서, 생후에 어떤 강도로 어떤 특정한 spoken language에 충분한 시간을 거쳐 expose되면 그가 expose된 언어의 문법을 자동적으로 생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갖고 태어난 잠재적 언어능력은 태어나면서부터의 그만의 독특한 역사에 의해 독특한 결을 갖게 된다. 즉, 그만의 독특한 음성, 음량, 고저, 텍스춰, 리듬 등등. 독특한 결을 갖은 하나의 돌(stone)이 되기에는 우주의 역사를 관통한 그 돌의 역사가 결정 지워 주듯이 , 한 인간 역시 그만의 유일한 잠재능력을 갖고 태어났고, 그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명상 같은 담담함의 상태에 도달하여 자신의 진아를 깨달아야만 한다. 자동적으로 주워지는 것이 아니다. 왜? 어린아이로 태어났을 때, 그 아이는 다른 동물이나 식물 群과 는 다르게,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는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helpless 하다. 콤푸터로 비유하자면, 스스로 부팅할 수 없는 처지이다. 물론 Pontential Force 또는 Latent Matrix of Propensities로서의 眞我는 아직은 스스로의 부팅을 통한 작동이 불가능하므로, 임시방편적으로 외부로부터, 즉 부모, 학교, 이웃 등등의 input을 통한 소프트웨어의 도움으로 부팅을 하는 것을 배운다. 그렇게 외부로부터 빌려서 습관화 된 것은 진아와 일치하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 언젠가는 그렇게 외부로부터 빌려서 인스톨된 소프트웨어들의 작동을 중단시켜 내려놓아야, 그 다음 그를 가능케하는 소프트웨어를 구축하게 하는 진아의 가능성을 대면하게 되어, 그동안 빌려서 자신의 인간콤푸터를 작동하여 오던 여러 소프토웨어를 선택적으로 버리고 새로 배열하고, 새 소프트웨어를 인스톨하고 하는 식으로 자신을 재 구성하는 절차를 거쳐야만 진아를 찾게 되고, 그 진아를 ‘알’로 삼아서 움티워서 그다운 그만의 인격체를 징성체를 영혼을 창조해 가는 것이다. 그렇게 꽃피운 인격체, 그렇게 개인의 역사를 써가는 삶이 알움다운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인 것이다. 어떻게 살았던, 그만의 역사적 삶의 여정이 담겨있어서, 존중 받을 권리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부연 설명하자면, 인간주체의 자아는 태어나서는 임시방편적으로 사회적(외부로부터)의 자극(그것이 의식적 교육이건, 흉내기건, 습관화이건)을 통해 구성되나, 그것을 언젠가는 그대로 유지하여 살아가느냐 아니면 조그맣게 또는 혁명적으로 수정하여 새로운 진아를 찾아 재 구성하느냐의 고비를 넘어야 한다. 그래서 사춘기 (그것은 사람마다 빨리 또는 늦게 온다) 처럼, 심각한 고민과 반란의 계절이 누구에게나 찾아 오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무의식적으로나마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 과정이다. 내가 교육받아 구성된 자아가 과연 나의 진아와 상호 호환(compatible)한것이냐 아니냐를 질문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외부적으로 다운로드 받아 인스톨된 자아를 갖고 살아가지만, 그 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하지 못하고, 의미 있는 삶을 못 찾고 기계적으로 살다 가버린다. 그런 삶은 자신 다운 자기만의 꽃을 못 피워보고 죽는 것이다. 물론, 그런 삶도 시사하는 바가 크고, 애처럽고, 또는 슬품의 또는 독 품은 한 많은 꽃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 애처로움, 그런 슬픔 또한 그 사람 스러움일 수 있다.
진아를 발견하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부여 받은 자아를 내려 놓아야 된다고 위에서 언급했는데, 도대체 ‘자아를 내려 놓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설명을 필요로 할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우선적으로 마음을 담담한 상태의 평정 심 있게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 것을 우리는 담의 정신이라고 부른다. 담담함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맘을 비우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아 조용히, 고요하게 하여, 생각을, 감정의 파고를 가라앉히는 것을 말한다. 고요히 가라앉아서 담담하게 되면 명료함이 따르게 된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흐려졌던 눈이 마음이 귀가 밝아 진다.
東洋的 思惟는 과연 개념적으로 모호한 사유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말인가? 왜, 동양적 인문학을 운운하는 식자층에서는 사려 깊게 탐색하지 않은 애매한 개념들을 마치 무슨 심오한 내용이라도 든 것처럼 늘어놓을 가? 그 한 예가, 유행하는 공(空)에 대한 것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동양지혜의 진수처럼 되어 있다. 동양적 현대화를 한다고 대단한 지성인을 자처하는 예술인 들 중에도, ‘여백의 미학’하고 말을 늘어 놓으면, 무슨 심오한 예술철학이 담긴 것처럼 행동하고 또 그걸 그대로 받아드린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엄밀히 따지자면, 제대로 따져 보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현학적으로 늘어 놓는 지식 놀이에 불과하다. 왜? ‘단색화’라는 말 장난처럼, 이런 단어들도 무(無)개념의 단어들을 나열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선 현대물리학은 절대진공 (vacuum) 상태를 부정한다 . ‘마음을 비워’서 ‘명상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물리학에서 말하는 진공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비유로서 한 말이라고 인정을 하더라도, 비유로서도 적당한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비워서 공의 상태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고, 만일 가능하다면, 그것은 그 명상상태에 들어가는 또는 그렇게 들어간 주체가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든 소프트웨어가 지워진 상태에서는 그 콤퓨터의 再부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담의상에 들어간다는 말은 이미 인스톨된 여러 소프트웨어들의 작동을 일시로 중단시켜 내려 놓는 다는 말이다. 작동이 중단되어, potential force로 하나의 latency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지워져서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다. 언제나 재 부팅의 가능성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명상의 상태는 空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상념을 내려놓은 상태, 또는 가라앉아진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그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하는 한국말은 ‘담담함’이다. “나는 지금 담담합니다’라고 어떤 감정적인 트라루마를 경험한 인간 주체가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 사건을 감정 개입 없이, 마치 다른 사람한테 일어난 일처럼 객관적으로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세상을 그리고 인간사를 모두 하나 같이 담담하게 대할 수 있는 그것이 바로 담의 정신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담담할 때 인간들은 의연할 수 있는 것이다. 흔들림 없이 굳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지인들이 윤형근을 ‘태산’같다고 한한 것 바로 그의 그런 담의 정신에서 나오는 의연함을 일컫는 말이라고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담의 정신은 결국은 명상 같은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닦아서 세상과 인간사를 담담하게 바라 볼 수 있게 하는 세계관이요 인생철학으로서, 이런 정신이 구현하는 예술동양적 수행문화의 산물이라고 보면 된다.

[5] 동양적 修行문화와 담(淡)精神의 예술
수행(修行)의 수는 닦을 수 자를 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나오는 修身은 몸을 닦는 다는 뜻이지만, 서양 철학에서처럼 몸과 정신 분리의 2분법이 전제되지 않은 동북아 문화권에서는 몸을 닦으면 동시에 마음도 닦게 되는 것이다. 이점은 실로 동서 사유의 극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행(行)은 행한다, 실천한다는 뜻이다. 즉, 수행은 닦고 행하는 것이다. 무엇을 닦는가? 내 몸과 마음을 닦는다. 어떻게? 몸에 때가 끼었을 때는 물로 씻어내면 되는데, 나의 영혼과 마음 세계를 무엇으로 어떻게 닦는가?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안경에 때가 끼면, 안경 너머의 세상이 잘 보이지 않는다. 먼지를 닦아 내야 한다. 겹겹이 쌓인 때는 닦고 또 닦아야 한다. 닦는다는 말에는 또 다른 의미도 들어 있다. 즉, 단련한다는 말이다. 반복해 단련해서 탄탄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그것은 비단 몸의 근육만이 아니다. 마음의 배움도 닦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갈고 닦는 수행의 이유는 무엇인 가? 우주에 수 많은 다른 개체들과 함께 존재하는 마당에 그 많은 개체들 사이에 흐르는 기운을 감별하여 반응하면서 조화롭게 그 자연의, 대우주의 순환의 기류에 자연스럽게 조화되어 순환하는 것 (거기에 역행하지 않고), 그것이 동북아시아 사람들한테는 삶의 이유요 목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보고 명료하게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 주체 (human agent)의 몸과 마음이 우주의 다른 개별 체들을 자기 방어적인 여러 겹의 방어벽을 올려 놓은 상태에서는 자연과 우주와의 자연스러운, 순리대로의 소통이 불가능하다. 방어 하지 않는 마음이 쌓여야만 수행을 나갈 수가 있다.

원래, 방어하지 않고 있는 존재가 바로 아기 즉 아이들이다. 그렇다고 수행을 하기 위해서 아이들처럼 무방어의 상태로 돌아가라는 것은 아니다. 이 아이들처럼 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 이 아이들이 커서 우리가 되는 것이니까. 아들은 불완전한 것이니까. 아이들은 처음에는 공격하지도 방어하지도 않는다. 아니 방어하지 못한다. 많은 것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아이들한테는 때로는 고통으로 다가 오고, 때로는 생명의 위협으로 다가온다.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아이들은 하나하나 벽을 쌓아 올린다. 원래 자기 속에, 자기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벽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벽이 이제 현실성을 갖고 한 겹씩, 쌓여져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아이들이 벽을 만들기 시작하는 이유는 일단 방어하지 않는 거이 우리 세상에서는 나름대로 고통이고, 그 고통을 이기기 위해 하나하나 방어를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 벽은 점점 더 두터워질 것이고. 그렇게 벽을 쌓고 또 쌓다 보면, 무지하게 되고, 우물 안의 개구리로 되어간다.

벽을 허물고 무방비 상태에서만 우주와 자연스럽게 소통 될 텐데, 이것은 곧 아예 방어하지 않는다 인데, 무조건 방어하지 않고 상처를 입은 것이 아이였기 때문에, 우리들은 아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진정한 사람(어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아무렇게나 다가 오면은 그냥 탁 열어 놓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방어의 문들을 열어 갈 적에, 그래서 다 벌거벗고도 상처를 받지 않을 적에, 그때 우주와 나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나는 그냥 우주의 자연스런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방어하지 않는 구체적인 방도,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닦음이고, 그와 같은 것을 실행해 나가는 조건이 담담한 마음 가짐이다. 그래서 수행은 동시에 마음을 쉬는 공부라는 것이다. 수행이 잘 되려면, 완전히 깨어있으면서 완전히 쉬어있어햐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상태가 우기가 담담한 상태에 있을 때이다. 즉, 담담하게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받아 들일 수 있을 때.

수많은 반복적인 동작을 통해서 근육운동을 하여 신체를 단련하여 탄탄하게 되면, 중심을 잡고 웬만한 외부의 압력에 아랑곳없이 굳건하게 버틸 수 있다. 정신도 마찬가지로 달구어 의연하게 만들어, 어떤 유혹이나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의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담담해 질 수 있어야 한다. 담담하다는 것이 평정심의 조건인 것이다. 모든 것을 담담하게 관조할 수 있는 태도를 기른 것이 담의 정신이다. 담담한 삶의 태도는 모든 예술과 정신 문화의 제 분야에서 담의 정신을 추구하게 된다. 즉, 담담함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 동북아 예술에서는 서구식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담담함을 추구한다. 현란한 어떤 것도, 열정적인 어떤 것 보다 담담한 색채, 담담한 분위기가 표출된 예술적 가치의 추구가 동북아시아 예술정신의 핵심이요, 동북아 예술철학의 전제인 것이다. 유교의 고전인 “대학”(大學)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신을 모든 사적 이해와 내밀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함으로써 우리는 평온(serenity)이나 고요(calmness)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주나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이 관계 속에서 가장 진정한 (가장 적합한) 위치인 ‘평안’의 상태나, 모든 통상적인 사고나 이해의 범주를 뛰어넘는 ‘사유’(慮)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초월을 통해 우리는 우주와의 합일을 실현할 수 있다.” 이는 어떠한 동양사상이든 (유교나 불교, 혹은 도교를 막론하고) 궁극적인 목표는 우주와의 합일(oneness with the universe), 우주와의 완벽한 소통이나 교감을 실현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을 모든 사적 이해와 내밀한 욕망욕망부터 자유롭게” 함으로서 담담해 질 수 있다는 말이다. 담의 정신의 궁극적인 추구는 우주와의 합일이다.
이 우주와의 합일이야 말로, 인간의 정신성 (human spirituality)이 발현인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晩年의 이마뉴엘 칸트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예술의 바로 인간의 이러한–즉 우주와의 합일—의 추구를 인간정신성의 핵심이요, 그러한 영원한 추구의 표현이 바로 인간의 예술성이라고 하였다. Art is an expression of the very basic human aspiration towards a perfect community, and this aspiration is the ground for the possibility of human spirituality. 이 문장 전반부의 “towards a perfect community”가 바로 더 큰 어떤 것 또는 전부 (totality)와 합일의 추구라고 Lucien Goldmann과 Lukac는 해석하였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김춘수의 작품들의 all-over적 분위기와 환경에서는 고요함(Calmness) 혹은 정적감이(stillness) 풍겨나는데, 이는 한자어 靜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또 김춘수의 작품들은 한편으로는 캔버스가 꽉차게 충만한 기운동의 흔적들로 채워져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동중정(動中靜)으로 오히려 그 속에서 완전한 정적(靜寂), 靜이 가진 심오한 고요함을 담아내고 있다. 유교경전 大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일상사의 사적인 이해관계와 은밀한 욕망들로부터 벗어나 일단 평정과 고요함을 얻으면, 그때 安(편안함)을 얻게 된다”이 말은 이때 비로서 자신을 둘러싼 우주의 부분들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진실되고 적절한 자신의 위치,장소,입장(position, place, 어쩌면 station이란 번역이 가장 적절할까?)을 찾아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서 慮(려)을 찾을 준비가 되는데 이것은 일상의 카테고리적 범주를 초월하는 사고나 이해의 방식을 의미하며 이 초월성이 궁극적으로 우주와의 하나됨(合一)을 가능케 한다. 이것은 바로 동양의 정신 수련법으로서 불교든, 유교든, 도교든 그 신봉자들을 단련시키는 방법이며 이러한 정신적 탐구의 궁극적 목표는 우주와의 일치, 완벽한 소통 혹은 연결성인 것이다. 김춘수의 작품들은 고도의 정신적인 작업으로 정적임과 고요함 즉 瀞의 상태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은 바로 정신적 연결성, 즉 합일(合一)에 도달할 가능성의 전제가 되고 있다. 장자의 말을 빌자면, 제물론(齊物論)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하나도 아닌 것이 동시에 둘은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사상”이다.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두 개도 아닌 것. 달리 말하자면, 세상, 우주의 만물은 상호 의존적이며, 서로 관통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나비와 같은 벌레도 어떤 본질적인 면에서 인간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고 장자는 “호접몽”에서 말한다.
오늘 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인간성을 제압해버릴 듯한 정신적 위기의 시대다. (아니면 달리 어떻게 함부르크, 파리, 베를린, 보스톤, 뉴욕 같은 주요도시에 스타벅스 커피점보다 많은 선(명상) 센터의 수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서유럽 및 북미 교육받은 계층의 정신적 갈증을 설명할 것 인가?) 개신교나 천주교 같은 전통적인 종교가 서양인들의 정신적 영적인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대부분 서구 국가들에서 일요일에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간다는 사람들이 5%도 안 된다는 것이다
서양의 모던 아트도 현대인들의 정신적 요구의 측면에서는 무용이다. 하지만, 예술은 인간의 정신적 탐구(spiritual quest)와 무관하지 않다. 칸트는 죽기 직전 남긴 주요 작품들에서 “예술은 완벽한 공통성(community)을 향한 인간 열망(aspiration)의 표현이다”라고 했다. 이 염원이 바로 인간의 영성 가능성의 전제가 된다. 서양의 모던 아트, 아방가르드 예술, 아서 단토(Arthur Danto)의 신조어인 post-historical art 도 끊임없이 존재하는(인간성이라는 이름의 가치가 있는 어떤 인간에게도 존재하는) 현대인의 정신적, 영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실패했다. 이것은 바로 교육받은 서양인들이 교회에 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갤러리나 비엔날레에도 가지 않기 때문이다. 서구 예술계는 사회의 다른 부분들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너무나 자기 충족적이고 독재적이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오직 후기자본주의의 상업적 조작인 것이다. 파리, 뉴욕, 베를린과 같은 소위 인터내셔널 아트 센터들에서 열리는, 타락해버린 예술 현장에 눈길을 주지 않고 김춘수나 그의 동료 담화 작가들은 그런 센터들의 최신 유행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서구의 허울뿐인 화려함의 그늘에서 끈기 있게 이어 온 그들의 노력이 몇 배의 보상을 받는 데 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작품들 속에는 바로 오늘 날 전세계적으로 교육받은 상당수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영적이고 정신적인 탐색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6] 김춘수의 靑은 淡 精神의 淡靑이다.
표면적으로 김춘수의 회화작품들은 단색추상 또는 추상단색화로 보인다. 전 캔바스를 한 가지 색으로 채운다는 것은 회화작품이라는 것 자체, 회화작품에서의 재현적 이미지라는 것 자체에 대한 보편적 기대에 대한 저항이요 문제제기가 함축되어 있다. 클라인 (Yves Klein)은 단색의 회화작품을 “자유로의 창문”이라고 불렀다. 즉 기존 회화의 회화적 평면이란 익숙한 기대감에서의 해방. 그는 화학자와 연구하면서 직접 그만의 적성에 맞는 靑색을 만들어냈다. 즉, 클라인은 물질성으로부터 해방된 感의 색으로서의 靑색을 그리고 또 어떤 공간적으로 한계 지어지지 않는 듯한 무한으로의 팽창을 상징하는 색으로서의 청색을 개발하여 국제클라인청색이라고 명명하였다. 클라인 청이 있다면, 김춘수는 김춘수가 추구하는 독특한 청색이 있고, 나는 여기서 그 청색을 김춘수 청색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클라인이 어떤 서구현대미술사의 역사적변증법하는 역사적 논리의 필연성에 의하여 발생된 단색화라면, 김춘수의 단색조의 회화는 클라인의 단색화와는 거리가 먼, 완전히 다른 종류의 회화요 예술작품이다. 표면적으로 단색화지만 단색화가 아니라는 것이 김춘수 회화의 정수라고 제시하면서, 설득력 있게 설명해보자.
어떤 평론가들이 김춘수의 작품에 대해 쓰면서, 그가 靑의 단색을 고집하는 이유는 청색, 즉 김춘수청색이 표현하고 내포하는 완벽한 명료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명료함의 추구야말로, 고대 히랍의 풀라토가 말한 가장 이상적이고 초월적인 이상향을 향한 정신적 추구의 순수예술성의 지향이라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다. 아니, 그 반대다. 東北아시아 선조들이 고수해온 전통 예술정신은 초월적 형이상학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프랑스의 걸출한 동양학자요 철학자인 프랑슈아 쥬리엥한테는 놀랍게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역저는 제목조차도 중국예술과 서양미학 (The Impossible Nude: Chinese Art and Western Aesthetics, MIT Press, Zone Books)이라고 붙였던 것이다. 왜? 서구미학은 앞의 평론가들의 언급처럼 플라토의 형이상학적 기초 위에 정립된 학문으로서 순수하고 완벽한 이데아를 이상적 모델로 전형으로 삼아 그 이상에 접근하려고 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 이상과 실천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 있다. 그런데 동북아적 중국식 사유에서는 그런 이상적 모델의 이데아와 실천이 이루어 지는 현실 사이의 간격을 전제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아니 그럴 필요성을 아예 느끼지 못하면서도, 서구의 사유의 문법에 못지 않은 세련된 사유의 문법을 창출해 발전시켜 서구의 문명에 못지 않은 거대하고 화려한 독자적인 문명을 이룩하였다고 감탄한다. 동북아 전통 예술성을 추구하는 예술행위의 과정에서도 다른 지적 동양적 사유와 마찬 가지로 어떤 이상적 모델을 미리 콤포지션한 후에 그것을 실천하려는 2개로 나누지 않는다. 김춘수는 비록 서양화를 하지만 그것은 재료적 마티에르의 차원에서이지 그가 추구하는 예술정신은 동북아의 선조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래서, 김춘수는 서구형이상학에 기초한 미학의 초월적 sublime이나 beautiful을 추구하는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담의 정신을 구현하는 담화의 회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점이 되는 것이다. 초월 대신, 동북아 예술정신에서는 Immanence의 예술을 추구한다. immanence와 transcendence의 차이는 사유와 감각의 차원에서 실로 엄청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의 동서 비교 예술학, 비교 철학은 앞으로 위기의 서구형 현대문명의 재구성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상적 원리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한번 쥴리엥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음미해 보라. 담화예술담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서구 허무주의의 늪에서 서구 사유 속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의외로 서구의 사유의 문법과 상이한 동북아의 고전적 사유의 문법 속에서 그 현대서구문명의 재구성의 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동양학강의라는 책에서 신영복도 같은 생각이었다.
“Chinese Civilization, which is one of the oldest (and was recorded in texts very early on), developed without any borrowings or influences from the European West for a long time, China presents a case study through which to contemplate Western thought from the outside – and, in this way, to bring us out of our atavism.” (p.9)
어떻든, 다시 부연하지만, 초월성의 추구는 동북아의 淡精神, 즉 명상의 예술정신과는 위배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일본식 선철학, 특히 경도학파의 기타로 니시다와 그의 철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선적현대일본회화를 주창하는 이우환의 예술행위의 정신성에 이율배반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담화의 예술은 초월적 예술이 아니라 내재성의 예술이다.
그러면, 김춘수가 항상 청의 담색 (청이 단색이라는 것은 무의미하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춘수의 청은 담한, 또는 담담한 색이라는 것이다)을 그의 작품에 쓰는 이유는 무엇 일가? 그리고 그것은 혹시 그의 회화가 바로 담의 조건 또는 담의 정신을 구현하는 예술행위이기에 어떤 필연성을 갖게 된다는 것인가? 이 설명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위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연꽃의 짧은 일생을 살펴보면, 혼이 있는 인간 정신의 삶의 여정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다. 아니, 그래서 시다타 고타마 (석가모니님)께서는 마지막 법회에서 아무 말씀 없이 그냥 연꽃을 한 송이 들어 보이시고 미소 지으신 것이 아니었을 가. 蓮이라는 種의 식물은 바로 그런 식물 課의 씨앗이 있어서 시작될 수 있다. 경남 함양의 고려시대 유적의 고고학 발굴 사이트에서 800년이나 된 지금은 석고화되어 광물덩어리의 일부분이 되어 버린 연이란 식물 과의 씨앗을 몇 개 발견하였었다. 광물덩어리에 붙어 그 일부가 되어 버린 연 씨앗은 생물학적으로는 죽어있는 생이 없는 그저 광물질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0년 된 광물질의 씨앗을 움 튀어서 꽃피웠다고 한다. 도대체 그 광물질의 어디에 생명의 불꽃이 숨겨져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내재된, 잠재적 생명의 가능성이었다. 고교 물리학 교과서의 역학에도 나오는 potential force의 개념이 있다. 이 역학의 힘은 또는 자기력 (magnetic force)같은 것은 그것을 자극(trigger)할 수 있는 어떤 다른 힘과 만나기 전에는 있음에도 없는 것이다. 자동차도 시동을 걸기 전에는 그저 고체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동을 걸고 나면 마치 생명체처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물론 그저 생의 가능성만이 내재된 광물질의 씨앗이 움 튀어지게 되는 순간부터는 같은 식물과의 씨앗들이지만 각기 다른 역사를 갖게 된다. 다른 환경, 다른 일조량, 등등. 그 각기 다른 역사는 같은 과의 식물의 씨앗을 각기 특성 있는 것을 꽃피워지게 된다. 같은 연 꽃이면서도 각기 다른 결의 꽃으로. 같은 과의 생선들이 모두 각기 다른 결을 갖고 있어서, 횟집의 사시미 셰프는 각 생선의 결을 고려해야만 최상의 회를 뜰 수 있듯이. 그래서, 서산대사의 “한 물건”에 대한 명상에서 바로 이런 대목, 즉 이 세상에 동일한 존재는 하나도 없어서, 각 개체의 유일성과 유일한 존재감 (즉 고유한 결)을 존중하고 찬양할 줄 알아야 된다 가르침 …


그러나, 인간의 경우 그의 진정한 인간개체성이 어머니의 난자나 아버지의 정자로 그 생의 과거를 과학적으로 역추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냥 물질이 아니라, 거기에 인간의 영혼 또는 정신성이라는 플러스 알파가 있기 때문이다. A Human Being is Not Just a Material Being but a Spiritual Being. 각 인간개체의 정신성의 결을 또는 영혼의 결은 동북아시아의 전통정신문화전통에서는 명상이나 요가 같은 靈的修練을 통해서만 발견이 가능하다고 본다. 마치 한 여름에 화려하면서도 순수하고 맑게 피어난 꽃이 잎이 지고 열매를 남기고 죽으면 남는 것은 연이란 식물 과의 씨앗뿐인데, 이 씨앗이란 것이 생명이 없이 inert하여 과거의 화려했던 한 여름의 생의 기억과 생의 열정 같은 것은 비가시적으로 내재되었을 뿐, 그저 하나의 광물질이 되어 버린 것처럼, 인간의 경우에서도, 인간의 모든 열정들, 감정들, 지식, 습관, 기억, 상념들의 소요를 모두 내려 놓고 마음을 고요하게 했을 때, 즉 마음이 담담해 졌을 때, 그때야 비로서 자기만의 독특한 결의 영혼을 갖은 인간개체로서의 자신(眞我)를 발견하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진아를 발견한 후에야 진정으로 자기 다운 정신체를 움티어 자기스럽게 생을 꽃피우는 것이 “알움다운” 삶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념을 내려놓아 마음의 연못의 바닥에 가라 앉게 되었을 때 그 연못의 진모습과 생태계의 전모는 모습을 명료하게 보인다는 것이 좋은 비유일 것이다. 그래서, 명상의 조건이 마음을 비워 공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게 가라앉혀서 연못의 물처럼 마음의 연못을 맑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담의 정신을 담담함의 조건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일본선이 오염시킨 국제사회에서의 명상 또는 선 사상을 동북아 선조들의 참된 선 사상을 되찾아 재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토마스 머톤이라는 미국의 천주교 신부이면서 동북아의 선명상에 대해서 깊은 이해와 관심을 갖고 수련했던 분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 명상은 그 남자나 그녀의 정신적 존재로서의 핵을 발견하게 하여 주며 또한 그 정신적 영혼의 핵이 그만이 피울 수 있는 그 다운 꽃으로 핵폭발 하듯이 생명의 힘이 폭발하여 꽃피워지는 것처럼, 모든 외부적인 조건과 권위에서 해방되어 그만의 그다운 영혼의 결을 지닌 정신적 개체로 꽃피워질 수 있다.”
[靜] 이란 漢字는 인간의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지칭하는 데, 나는 이 글자가 ‘<<김춘수의 靑’>>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다음의 방정식을 음미해보라.
<<[靜]= [靑]’Blue’ + [爭]’conflict’, ‘turbulence’>>
靜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담담함을 통한 담정신의 조건이요 명상의 조건이다. 그런데 靑이 爭을 잠재워 靜의 상태를 조성하는 것이 아닌 가. 동북아의 禪사상에서는 이런 靜의 상태에서만 인간은 모든 상념에서 벗어나 그냥 氣의 파장 또는 파장의 氣體로서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기체들과 파장과 파장으로 서로 합일하고 공명하고 . . .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유가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한 예를 들자면, 20세기에서 가장 유명한 물리학이론을 살펴보라. 즉, 아인슈타인의 이론: E = mc2
모든 매체는 에너지의 파장으로 환산 가능하다는 것으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은 그것만의 wave length와 amplitude를 작은 파장으로 표현 가능하니, 결국 파장끼리는 그 파장의 길이의 단위 등에 의해 어떻게 공명하든지 불협화음인지 합일인지를 자동적으로 맞추어 나가게 된다. 김춘수의 회화는 모든 것이 이 파장에 대한 것이다. 김춘수의 靑(blue)는 hue, shade, tint와 value에 따라 같은 靑이라도 wave length가 다 다르다. 기체로서의 청의 파장들이 서로 만나고 춤추고 불화하고 . . . 이러면서 전체적으로 어떤 기세를 우리는 것이 김춘수의 회화의 백미라고 본다. 우리는 산세를 그리고 지세를 또는 필세를 운운한다. “산세가 수려하다” 또는 ‘지세가 험하다’등의 말을 한다. “기세 등등하다”라는 말도 한다. 바로 이런 기세의 미학을 김춘수의 회화에서는 실현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온전히 담정신의 조건하에 가능한 것이다. 김춘수의 청은 담의 청이고 그래서 또한 명상의 청이다.

By Kai Hong, [Copyright©2015 by Kai Hong]



靑의淡畵作家로서의 金春首
Kim Tschunsoo as Daamhua Painter

I. Kim Tschunsoo’s Issues with Modern/Contemporary Global Art
Any artist, if he or she deserves this ascription of ‘artist’, must have one big question, one main subject matter, one haupt Sache in German, one principal matière d’une pensée in French or one main problematic for his preoccupation in all his creative projects and processes as an artist. I’m told that for Kim Tschunsoo it’s been the question of how to look upon an empty canvas, usually in the shape of a rectangle or a square, which is to be filled on its way to becoming a work of painting. The canvas is the interface device between the artist and the rest of the world; it can stand for a window that opens out onto and make the rest of the world accessible, visually, to the painter. But, a wide-open window is never a perfect interface device for a human agent –the artist, for the window frames and crops the visible world through it, screening out the rest of the world. But the real world is in all cases in all directions a continuum. That is also the critical shortcoming of the medium of photography in its capacity to represent the reality in spite of all that mechanical capability of automatic reproduction of the reality; no film, no photography can capture the reality of the world as such. We don’t even have to talk about other intervening, constantly obstructing necessary devices of perception such as language, perceptual schemata, matrices of accumulated past memories and habits, all of which to create a mind-screen which at the same time enables us to perceive and screens out much of the real world. We’re thus never able to have a direct access to the real world, the living world. It is said that Kim Tschunsoo, as a young artist, confronted this very issue of direct access to the reality, unfiltered through our matrix of perceptual schema: how to overcome this ontological abyss between the reality and any artistic creation.
All a film can do is to project onto a screen a tiny framed part of the world, screening out the rest of the world lying outside the frame. A framed tiny bit of the world is no real world; it’s a dead world, forever distanced and alienated from the real, living, continuously changing world. There’s an ontological abyss, never to be abridged, between the world projected onto the screen or a photographic slide and the real world in which history is constantly being made and remade. So, likewise, a painter’s canvas is, whether as a window to the world out there or as a screen to project a world onto it, it is inadequate. Increasing awareness of the inadequacy of the canvas as the representational site, in spite of having invented all kinds of brilliant technical devices for making the painter’s canvas resemble a real window, made Western painters to critically question the trompe l'oeil tradition of painting. The modernist consciousness of such questioning on the part of the advanced painters made them to break with the representational tradition of painting and goad them onto the road to historically deconstructing their inherited tradition of trompe l'oeil painting by expunging layer after layer the accumulated habits of representational traces over many centuries from the flat surface of the painter’s canvas . The modernist commitment was therefore to be faithful to the ontological conditions of the given medium of painting –namely, to the very flatness and the rectangular bounded shape of the canvas as well as the material qualities of the oil or any of its substitute matière. However, in following the logic of historical deconstruction of the trompe l'oeil tradition, or equivalently put, in its achievement “of increasingly adequate attainments of its pure state,” the modernist painting pushed itself to its own death, when the final phase of the unfolding modernist painterly-stylistic commitment unfolded such monochrome paintings as Ryman’s or shaped canvases as Frank Stella’s. Indeed, this is how Don Judd and Robert Morris saw the situation of modernist painting in viewing Frank Stella’s or Kenneth Knowland’s shaped canvases, they said amongst themselves somewhat like the following: How long can we go on making shaped canvases? They’re just literal canvases of certain shapes. Literal canvases are just that –literal objects. Henceforth, no more painting, but to make objects, literally any objects and exhibit them in Art Exhibition Rooms as Art. This is actually what had happened and it is for that reason that Michael Fried calls them “Literal Art” rather than “Minimal Art”, a conceptually impoverished and even false moniker which created a lot of confusion in the subsequent modern and avant-garde art discourses.

[1.2] If a canvas is not a window or a vehicle of representational painting, then could it not be just the space for self-expression? Indeed, that was one explanation of ‘abstract expressionism’ by looking upon painters’ canvas as a kind of mind-screen. Now it is a window, not out towards the world but of one’s mind. But, clearly, here too, Kim Tschunsoo’s ‘artist’s problematic’ persists –namely, the problematic of the impossibility of direct access to one’s interior. Any expression, whether artistic, poetic or prosaic or whatever else, it has to be given expression in some language, whether it’s a gestural, vocal, written or whatever other kinds. The notion of ‘action paining’ á la Harold Rosenberg once became fashionable through its association with Post WWII existentialism á la Jean-Paul Sartre and Camus. In that version of existentialism ‘action’ was to be the direct result of an individual commitment, for whatever cause, whether moral or political; the choice (to commit) is made and then acted upon all the passion he or she could muster. That, Sartre advocated, were the only way to combat Nihilism which was an unavoidable existential condition of modern men and women (and he meant ‘Western’ men and woman) in Post-WWII world; it was, for him, a historical mood, like Pest or some other equally devastating contagious disease, which had infected every living person of conscious minds.
Action painting, also sometimes called "gestural abstraction", is a style of painting in which paint is spontaneously dribbled, splashed or smeared onto the canvas, rather than being carefully applied. The resulting work often emphasizes the physical act of painting itself as an essential aspect of the finished work or concern of its artist. According to Rosenberg the canvas was "an arena in which to act". Rosenberg's critique shifted the emphasis from the object to the struggle itself, with the finished painting being only the physical manifestation, a kind of residue, of the actual work of art, which was in the act or process of the painting's creation. Over the next two decades, Rosenberg's redefinition of art as an act rather than an object, as a process rather than a product, was influential, and laid the foundation for a number of major art movements, from Happenings and Fluxus to Conceptual, Performance art, Installation art and Earth Art.
In a way, Kandinsky and Mondrian had already pioneered a new Art of easel painting in which the canvas looked upon as the locus or site for representing the Artists’ inner mindscape rather than the portrayal of external objects; painter’s canvas as mind-screen, the artists wanted to evoke emotions and feelings within the viewer by evoking, addressing or delineating through the aesthetic senses. Action painting wanted to go much further, invoking both Jung and Freud’s ideas of the subconscious as its underlying foundations. (Notice here the locution I use of “wanted to go much further” rather than “went much further” in the above sentence. It is one of the key points I make in this essay. I’ll be coming back to this point later in this essay.) The paintings of the Action painters were not meant to portray objects per se or even specific emotions. Instead they were meant to touch the observer deep in the subconscious mind, evoking a sense of the primeval and tapping the collective sense of an archetypal visual language. This was done by the artist painting "unconsciously," and spontaneously, creating a powerful arena of raw emotion and action, in the moment. Influenced, perhaps, by the surrealist emphasis on automatism (influenced by psychoanalysis) claimed a more direct access to the subconscious mind.
However, it’s non-sense to merely claim that they, the action painters, had direct access, when they were not able to show that they in fact had a method or methods of such access. It just won’t do merely to refer to some psychoanalytic theories, as they are just that --mere theories. Nor were the so-called action painters able to show in their works of painting that some features or aspects visible or tangible in some other non-visual way were the clear-cut traces of their having had direct access to their subconscious not to speak of the collective unconscious á la Carl Jung. I wish to show in what follows that Kim Tschunsoo as well as his fellow Dáamhuam-hua painters have found a method of direct access not only to the external world but to their own inner mindscape. It will in fact be shown that the direct access to the external natural world and their inner being are not two separate operations but one. They’re capable to doing what the Western action painters have not been able to do only because they are painting as Korean Artists, steeped in the traditional mind-body-spiritual exercises of Suhaeng (修行).

II. The state of dáamness as ‘Deterritorialization’ of Mindscape:

Notice that I put single quotation marks on either side of the term, ‘deterritorialization’ which is a term Deleuze and Guttari made famous in their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or Deleuze’s Logic of Sensation. Deleuze is one of the very rare Western philosophers who have seriously tried to get away from the standard Western Aesthetic and Art-theoretical edifices and construct something alternative to them. The terms of ‘deterritorialization’ and ‘defacialization’ are two among other key terms in his efforts to radically reinterpret Cezanne’s landscape and Francis Bacon’s paintings of contorted

By Kai Hong, [Copyright©2015 by Kai 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