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ulpture which exists perfectly 오롯이 존재하는 조각

CHOI IN SU

2013-10-25 ~ 2013-11-25

최인수 - 세상에 오롯이 남을 형상을 위하여

어느덧 세상은 그와 함께 나이를 먹었다. 갑자의 해를 다 돌고도 다섯 번이 지나갔다. 삶의 시간이 한정된 탓에 사람들은 ‘예술’을 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히포크라테스는 그의 잠언집(Aphorism)에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Vita brevis ars longa)"라고 토로하였다. 또한 인간의 정해진 삶의 시간은 그리스 비극의 원천이 되었다. 그 짧은 인생이 남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회자되어 서사를 이루고 때론 역사가 된다. 그 짧은 시간에 지나온 흔적을 남기려고 혹은 자신이 살았던 세상을 탐구하려고. 최인수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간혹 만나는 그는 영락없이 예술가의 외양을 하고 있다. 넉넉한 인간의 전형을 지닌 예술가의 태도이다. 약간은 후줄근한 옷차림은 그가 지니고 산 낙천성을 보여주기도 하고, 타인들에게 무리 없이 다가갈 수 있는 빈티지(Vintage)의 여유를 보여주기도 한다. 유일하게 시간을 타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의 낙천주의와 강하게 대비되는 것이 있다면 그의 눈이다. 그의 눈은 항상 호기심으로 가득 찬 그리고 엄격한 판단력으로 번뜩이고 있다. 그의 스승이었던 우성(又誠) 김종영은 항상 엄격한 심미의 눈인 금강안(金剛眼)을 스스로 그리고 제자들에게 늘 강조하였는데, 그런 안목과 시력을 타고난 이가 그인 것 같다. 말을 할 때나 혹은 들을 때나 그의 눈은 세상에 처음 눈을 든 아이의 명료함을 보여준다. 그런 눈을 대할 때 마다 필자는 긴장과 경계를 풀 수가 없다. 그가 날 쉬이 간파할까봐 겁난다. 그런 필자가 자리를 바꾸어 최인수를 바라보는 입장이 되었다.

최인수의 조각은, 다른 예술가들이 보편적으로 그런 것처럼, 자신의 외양과 품성을 닮았다. 작품은 그의 분신이며, 그가 인생을 두고 행한 생각의 양만큼 무겁다. 하지만 이 무거움은 그가 털어내듯 말하는 언사처럼 명쾌하기도 하다. 그와 그의 작품을 논하려면, 역시 다른 작가들처럼, 시대의 내외적 환경과 맥락 속에서 언급해야 할 것이다. 미리 다짐하건대, 그는 한국현대조각의 선구적인 세대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미술에서 모더니즘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던 시기에 미술을 배우고, 이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다음 세대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를 1,5세대 작가라고 부른다. 소수점을 찍은 것은 그의 위치가 시기적으로 모더니즘과 탈(脫)모더니즘의 경계에 있었다는 점과 아울러 그의 조각이념이 이 경계선 위에서 윤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최인수 작품의 외형은 그의 외모를 닮아 질박하다. 질박한 형상은 모든 눈요기 거리, 즉 스펙터클을 논외로 만든다. 그는 “spectacularity, 그것은 콤플렉스에서 온다.”고 단정하면서 현재 미술에 대한 신랄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런 그의 논지에 걸맞게 그의 작품이 지닌 규모나 외형은 철저하게 절제된 모습을 띤다. 무딘 시선은 그 작품들이 고졸(古拙)하거나, 소탈한 정도라고 평가한다. 단견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의 작품들의 형상은 단순하다. 그러나 이 단순성은 복잡하고 구체적인 외부의 형태를 압축하거나 개략적으로 정리한 결과가 아니다. 그것들은 원래부터 그런 것처럼 보인다. 이 관찰의 결론은 그가 구상에서 출발하여 추상의 단순성에 기계론적으로 이르렀다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상적으로 비추어진 단순성은 결코 의도되거나 연출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근거와 논리를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필연성은 아마도 작가가 들려주고자하는 메시지의 명료함과 상통하는 것 같다. 이러한 필연성 때문에 추상미술에서 흔히 논의되는 ‘환원주의’적인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해 두고 싶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형상사고는 선험적(a priori)인 것임에 틀림없지만, 철학적 심오함보다는 경험론적인 감각성에 더 가까운 형상사고에서 배태된 것이다. 또한 그 감각성은 독특하면서도 매우 세련된 형태로 정제되어 있어 언어로 그 형상성을 떠받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립적이다. 이점에 착안해서 미술사적으로 그의 위치를 재고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한국조각의 모더니즘의 1세대가 형성해 놓은 사유구조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1.5세대 작가 군에 속할 수 있으며, 이들이 취한 노고와 갈등을 가장 치열하게 경험했던 사람이다.

만약 현대의 미술사조에 최인수를 배치한다면 어디쯤이 가장 적당할까? 성급하게 판단한다면 도널드 저드(Donald Judd)나 댄 플레빈(Dan Flavin)과 같은 이지적이면서도 감성의 극단을 걸어갔던 미니멀리즘(Minimalism)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최인수의 작품 속에는 적어도 이러한 미니멀리즘의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조각을 배우고 자신의 스타일(?)을 키워나가던 시대는 바로 언급한 예술가들이 종횡무진 활동할 때였으니까. 이러한 미술사적 관점에서도, 최인수의 작품은 단순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단순성은 일방적으로 환원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그것과 단박에 구별된다. 사실 모더니즘의 작품들은 단순해져 가면서 그 의미의 분량을 무한대로 확대시켜 놓았다. 최인수는 그 의미마저 요약하면서 명징한 상태로 의미체계를 보여준다. 같은 맥락에서 미술비평가 고충환은 “최인수는 언뜻 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구조물의 한계를 넘어서는 작품들을 제작해왔다. 이 작품은 작가가 작품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파내 자국을 남김으로써 미니멀리즘 조각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구조물적인 성격을 이탈하고 있다. 따라서 매우 촉각적으로 인식되는 이 작품은 오히려 반(反)미니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점토 덩어리, 석고, 철 작품을 바닥에 굴림으로써 확장된 공간성을 인식하게 하는데, 작가는 그 표면을 마치 부드러운 재질로 제작한 것처럼 처리함으로써 구조물의 인상을 지워버리고 있다. 최인수는 "형태는 보는 게 아니라 듣는 것이다"라고 하여 조각물이 굴러다니는 소리를 관람객들이 공유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렇듯 그의 작업은 사유를 통해 단순한 시각적 대상물일 수 있는 조각의 지평을 한 단계 더 넓히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따라서 최인수의 작품은 그것을 순수한 감정으로 접수하려는 감상자에게는 감동 덩어리이지만, 분석을 할 요량으로 접근하는 평론가들에게는 버거운, 아니 무서운 존재가 된다.

조각은 공간을 차지함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 현존은 사물의 영원한 정지 상태, 곧 죽음이다. 여기서 생명의 온기를 찾으려는 조각가의 노력은 피그말리온의 전설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풀리지 않을 과제로 남아있다. 생명은 공간과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 위에 정확히 존재한다. 어떻게 교차시킬 것인가는 예술가의 몫이자 능력이다. 최인수는 생명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지니게 만든다.
자코모 발라나 마르셀 뒤샹 등이 영화에서 얻은 환시효과를 이미지에 적용함으로써 시간을 미술 속에 한 요소로서 삽입하였다지만, 이러한 시도는 결국 이미지를 좀비를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최인수는 작품을 시간의 뭉침으로서 유사한 시도를 한다. 예를 들면,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주철로 만들어진 긴 원통형의 작품을 들 수 있다. 바닥에 태연히 누워있는 이 긴 원통은 굴려서 제작된 것이다. 작가가 한 일이란 흙덩어리를 바닥에 굴린 일 뿐이다. 이 작품은 그래서 굴곡 면에 그것이 굴려졌던 장소를 기억하고 있다. 이 작품의 특색은 정확한 원주가 아니라 약간 불확정적인 표면을 가진다는 점이다. 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몸에 새겨진 (혹은 각인된) 것은 작가의 노동과 그 노동에 대항했던 다양한 외적 요인들이다. 작품의 몸통은 노동과 외계를 아날로그적인 시간으로 받아들인 것인데, 이것은 과거 수메르에서 흔히 만들어졌던 원통형 돌도장을 연상시킨다. 이 도장에 새겨진 그림이나 글씨가 굴려진 진흙 위에 남겨지는 것이 특색인데, 이 방법을 최인수는 역행하는 식으로 작품을 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간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머금고 있는 작품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시간을 품기 위해서 작가는 흙을 주로 사용한다 - 물론 작가의 Œuvre에는 다양한 재료의 사용이 쉽게 발견된다. 흙은 소조작업을 위한 필수적이며 보편적인 재료이다. 그러나 형태를 자유롭게 형성하기 위한 일차적인 목적을 넘어서, 작가는 재료가 가진 특성을 작업의 의미와 연관시키고 이것을 작품의 본성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최인수가 지닌 흙에 대한 사유는 남다르다. 흙은 가변성, 저항성 그리고 흡수성을 지닌 유동적인 재료이다. 석재나 금속재에 비하면 연성적이다. 이러한 특성에 기인하여 최인수는 이 질료적인 대상을 여성화한다. 남성으로서의 작가와 여성의 질료가 만나 이루는 합일로서 작품을 이루는데,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작가는 남성의 권위와 폭력으로 질료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서로 조응하는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태를 이루는 과정이 작가에게는 중요하다. 이 과정이 시간의 연속이 되어 작품의 몸을 이룬다. 여성성을 설정하는 데에 다른 이유가 있다면, 흙이 지닌 근원적인 이념이다. 흙은 모든 종교와 신화에서 말하듯이 생명의 근원이다. 생명은 시간상에서 그 존재를 펼친다. 이렇듯 모든 의미들은 최인수의 사유 속에서 촘촘히 엮여진다.

시간과 공간이 겹쳐지는 곳은 바로 ‘길(path)’이다. 길은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유동적인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공간이다. 최인수의 작품은 공간과 시간을 중첩시키거나 일체화함으로서 고유의 스타일을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정중동(定中動)이라고 개념을 모든 시각예술이 가지고 있거나 요구받지만, 그의 작품은 동적인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서 마찬가지로, 최인수에게 공간과 시간에 대한 갈등적 관계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이 둘은 그리움을 안고 만난 남녀처럼 잘 어울린다.
김종영이 조각이 지닌 정체성을 괴체(塊體)에서 찾았다면 최인수의 조각은 이것을 해체하고 있다는 것이 맞다. 그의 조각은 표면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더 합당하다. 물론 그 안은 물질로 충만한 덩어리이지만, 그 중량(mass)이나 부피(volume)로서 의미를 갖기보다는 표면으로서 존재이유(raison d'etre)를 설정한 편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최인수의 작품은 2차원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실제로 그에게 2차원은 3차원이라는 조각의 세계가 넘나드는 또 다른 지평일 뿐인 것 같다.

최인수의 작품이 약간 ‘반(反)조각적 성격을 지닌다’ 라는 말은, 체적(體積)을 지니지만 그 것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오히려 그 표면이 체적이 자리할 위치를 점한다. 그래서인지 체적이 보유한 중량감이나 물질적 존재감은 표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형국이다. 표면은 형태와 공간의 접면이 되며, 여기에 존재와 공간 혹은 존재와 시간의 긴장감이 형성된다. 더 강조하면, 최인수의 작품이 지닌 의미는 표면에 압축되어 나타난다고 보겠다. 표면은 표상작용을 위한 마루가 되고 그 위에서 의미들이 대화를 한다. 그 대화를 실현시키는 언어는 밑에서 다루어질 최인수 만의 독특한 조어(造語)능력이 만들어낸 것이다.

표면의 중요성은 그의 작품을 비(非)결정적 조각이라는 개념 속에서 생각하게 만든다. 비결정적이라 함은 작업의 프로세스가 여전히 진행 중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유동적이고 다양한 결과를 개방시켜놓았다는 의미로 접수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 보유한 시간의 문제다. 작품에 개입된 시간은 표면 위에서 사유의 지층처럼 얇게 쌓여가고, 그것의 피막을 우리에게 겨우 보여주는 식이다. 표면은 우선적으로 작업의 프로세스를 기억하고 있는 저장소이다.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기호들은 그 시간을 현재화하는 역사적 기록들이 된다. 그래서 그저 쥐었던 버린 것 같은 형상의 <태고의 시간>이란 작품 속에서 물질과 형태에 대한 “고고학적 사유”라는 개념을 연계시키는 것도 가히 틀린 것은 아니다. 무상함, 허무주의, 단순성이 지배했던 모더니즘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최인수의 작풍을 설명해 줄 중요한 화두가 된다. 최인수는 관념의 거대주의를 해체하기에 이른다. 오히려 의미 쌓기를 버림으로서 진정한 의미를 구성한 것과 같다. 이것은 마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와 같은 선승들의 모순된 발언 속에 숨어있는 본질과 유사하다. 최인수가 찾은 것은 창조(행위)가 지닌 궁극적인 힘이다. 그는 작업을 할 때, 흙을 주무르는 손 안에서 우주적인 차원의 힘을 느낀다.
체적에 대한 문제로 다시 돌아오면, 최인수의 조각은 물질적 대상으로서의 조각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것이 주물로 떠 있는 청동작품이든 철을 자르고 비틀어서 구성한 형상물이든 간에 그것이 지닌 중량감에 의미의 무게가 실리는 대신에 이 표면에 정착된 흔적들이 더 큰 의미구조를 지닌다. 그러니까 최인수의 조각은 물질로 충만한 몸이 외부로 확산하는 양태를 지양하는 편이다. 표면은 그야말로 외부와 내부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와 작용의 임계점이다. 보이지 않는 임계점을 최인수는 시각화한다. 그래서 이 간단 무구한 형태들은 조각이 지닐 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적 존재감을 드러내는 요소로서만 작용한다.

최인수의 형상적인 시어는 관념의 확대를 위한 언어의 사용이나 개념의 활용으로 작품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말초적인 경험이나 감각 속에서 측량하기 어려운 깊이와 무게를 이끌어낼 수 있다. 수사학적 기법이 없는 화법(話法)은 거의 숭고미(the Sublime)에 가까운 감정을 유도해낸다. 내게 가장 숭고한 작품은 <태고의 바람>이다. 그냥 쥐었던 놓은 작은 흙덩어리가 이 작품에 가해진 예술의 전부이다. 오직 손만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이 이제 화제가 되었다. 인류 최초의 예술행위를 고고학적으로 재현한 것 과 예술가와 감상자를 매개하는 예술작품의 원리적인 기능을 최대한으로 강조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는 크다. 그래서 누구라도 작가의 손이 지녔던 온기와 호흡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이렇듯 가장 초보적이고 원시적이기까지 한 조형언어가 인간의 위대한 시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최인수는 이러한 조형언어에서 유희성을 또한 강조한다. <길>이라는 작품은 유희적이고 또한 명상적이다. 유희적이라 함은 작가가 지닌 독특한 화술(rhetoric)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창조나 사유와 같은 거대 의식을 힘들이지 않고 말한다. 이렇게 쉽게 나오는 것은 작가가 이 사유들의 영역을 잘 해쳐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가 쉽게 말하는 것은 그 ‘길’을 잘 다녀왔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작가는 “어린아이가 자동차 바퀴를 굴릴 때 책상 위와 사람 몸 위를 거침없이 지나다닌다.”면서 “이때 새로운 공간이 창조된다.”고 말했다. 어린아이의 굴리기 행위처럼 작가도 굴리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조각이 말하게 한다. 그리고 듣는다.”

최인수의 사유는 깊고 무겁다. 하지만 그 무거움을 작품으로 보는 우리를 짓누르거나, 사유의 미로 속으로 구속하지 않는다. 최인수가 조각이나 그림을 매개로 던지는 화두는 매우 단순하면서 명징하다. 그래서 외양상 명상적인 조각의 형태를 지닌 듯 보이지만, 철학의 명분과 체면을 추종하는 공허함이 아니다. 작가는 심오함이나 엄격함 따위의 현학적 언사들에 지쳐있는 우리들을 편안하게 만든다. 의미의 깊이를 자랑하는 듯 한 숭고한 개념 따위는 최인수에게는 낯설다. 오히려 그의 언사는 유머러스하다. 모더니즘의 엄격하고 근엄했던 형상성에서 탈출구를 마련했다는 점과 드디어 숨 쉴 공간을 관객에게 주고 있다는 점이 최인수의 작업을 쉽게 인지되고 또한 깊게 사유하게 만든다.

김정락[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