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Between there

KIM TAEK SANG

2013-12-01 ~ 2013-12-30

김택상 - Meister-Painter of Light

[1] 김택상 회화는 서구적 단색화도 한국적 단색화도 아니다.
김택상은 서양화가로 훈련 받은 작가이다. (미술대학 서양화전공이 말해 주듯이) 그리고 그의 작품이 서양식 캔버스 위에 그려졌고 또 아크릴물감을 쓴 다는 것 등이 그 작품들을 서양화의 작품들이라고 단정하게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대 규모의 <단색화>展에서 그의 작품도 서양의 현대주의 미술사에서 역사적 변증법적인 이유 때문에 나오게 되는 Monochrome Painting의 일종으로 간주 되어 소개되었었다. 물론 그 전시에서는 “비록 서구의 모노크롬 회화와 동일하게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동양문화양식에 젖은 동양사람들이 하는 모노크롬화이기 때문에, 어딘가 동양적인 무엇이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전시회에 나온 한국작가들의 모노크롬 회화 작품들은 서양의 그것과는 달리 동양적 모노크롬회화라고 하면서, 모노크롬회화의 간결한 컴퍼지션과 단색위주의 색채는 바로 일본식 젠 아트의 일종으로 간주할 수 있고, 그래서 동양식 모노크롬화는 젠 (즉 禪)修行의 예술적인 한 방법이요, 또 그래서 선 수행의 핵심인 마음을 비워서 空의 경지에서 나오는 작품이고 空에 대한 회화적 명상의 결과라는 식의 이론을 전개하곤 한다. (특히, 이런 식의 고유한 동양적 모노크롬회화의 담론으로서 일본식 젠 수행을 차출한 것은 재일교포 화가, 이우환씨가 일본의 경도학파철학자인 니시다기타로의 선적체험을 서양의 현상학적 용어로 풀이한 젠 철학의 담론을 무비판적으로 그리고 선별적으로 매우 adhoc하게 (즉 억지로, 임으로) 도식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우환의 선철학적 담론 속에서의 동양적 평면화 또는 단색화는 한국화단에서 한국에서 나온 최초의 세계적인 신 회화운동으로 돌풍을 일으켰으나, 그에 상응하는 국제적인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이해가 안 되는 억지 주장처럼 여기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서양평론가들이 이런 류의 동양적 현대화의 전시 평을 쓸 때면, 의례적으로 “동과 서의 창의적 만남”이 시도된 점이 돋보이는 작품 운운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식의 사유에는 간단하게 다음의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단색화” (모노크롬화)라는 것이 개념적으로 아무런 중요한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모노톤 색채의 그림은 세상에 널려있다. 그것들이 다 미술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단 말인가? 아니다. 그럼 왜 갑자기 서양의 현대미술사에서는 모노크롬 회화라는 것이 튀어나왔나?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즉, 서양의 현대주의 회화는 서구역사의 고유한 내재적인 역사변증법적 전개의 과정에서 나온 일시적인 현상이지 무슨 새로운 회화의 지평선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하바드대학의 스탠리카벨 교수가 지적했듯이 이미 19세기 중반경에 서구의 가장 역사적의식이 진보된 지식인 (니체 같은), 예술가 (Edvard Manet같은 화가나 바그너나 쉔베르그 같은 작곡가나 제임스 조이스 같은 문학가나)들은 하나 같이 자신들이 계승한 전통적 서구 예술의 규범이 와해되어 자신들의 예술행위에 필요한 문법(그램머)이 없어졌다는 자각이었다. 실로 이것은 엄청난 자각인 것이다. 왜? 문법이 없는 언어를 상상해 보라. 그런 언어로 말을 해서는 누구도 이해 시킬 수 없을 것이다. 왜? 어떤 이상한 소리를 지껄여도, 그것이 그 말이 아니라고 할 잣대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예술행위를 한다는 것은 언어행위를 한다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회행위인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마틴 하이덱거와 더불어 20세기 두 명의 가장 뛰어난 천재 철학자중의 하나라고 불리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명제일 것이다.) 언어행위가 사회행위라는 말은 바로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이론인 “Impossibility of Private Language”와 동일한 주장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회적 행위가 사회적 행위로 수용되기 위해서는 어떤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즉, 그 사회의 규범에 의거한 상식적 선에서의 규칙을 따라야만 된다는 말이다.

이런 역사적으로 유일무이한 상황은 서구사회의 산업화 현대화 과정 속에서 내재적으로 파생된 결과이니, 더욱더 크나큰 문명적 차원에서의 위기인 것이다. 인간사회 모든 분야의 합리적 논리에 의거한 구조조정(Structural Rearrangement)은 물질적인 면에서는 잘 이행되어, 그 현대화 논리의 내재적인 동력에 의하여 가속을 붙이며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 인간의 사는 모습, 즉 거주양식, 도시의 형태들을 과격하게 바꾸어 놓았지만, 동시에 정신적으로는 인간성 피폐화, 인간의 비인간화가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면 (요즈음 농축산업이란 이름으로 공장 식 농작과 도살용 가축산업의 공업적 논리의 도입은 가축의 본성 (즉 the Animal Nature of Cow or the Animal Nature of Chicken, for example)을 바꾸어 놓아 이제 더 이상 소나 돼지처럼 생기고 고기 맛은 비슷하지만, 과연 그렇게 키운 동물들의 고기가 정녕 소고기이고 돼지고기라고 부를 수 있을지를 의심하게 된 시대에 살게 된 것 도 다 현대화의 결과인 것이다.

그냥 고기기계(Meat Machine)로 수학적 연산이나 하고 공장 식 공정을 거쳐 제작되어 나오는 음식산업이 다량으로 쏟아내는 여러 중독성 화학적으로 개발된 맛에 중독되어 탐욕스럽게 먹어 제키고 행복해 하는 괴물들로서의 비인간화된 인간들로 거리는 채워지게 된 지금, 우리는 고기기계가 아닌 먹고 마시고 섹스 하는 짓거리 외에 더 다른 차원에서의 정신적 추구를 갈망하는 인간으로서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더욱이 이런 인간에겐 동물적 본능 이외에도 또 내재적으로 내면에 존재하는 정신적 추구, 또는 영적 추구는 더 큰 더 높은 더 고귀한 무엇과의 합일(合一)을 추구하는 human spirituality에 다름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Human Spirituality의 발현은 바로 예술일진데, 사회행위로서의 예술행위가 문법이 와해된 무정부상태의 역사적 조건이라면, 도대체 예술가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되면서,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필사적인 실험적 제스춰로서 나온 것이 바로 현대 예술인 것이다.

현대예술의 탄생은 축복할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아드리면서, 용기 있게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 나가려는 눈물겨운 역사적 책무쯤으로 보면 될 것이다. 문법이 와해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우선 철저하게 문법의 와해를 인정하고 아직도 대다수의 인간들이 이미 와해된 규범의 낡은 공식이나 도식적으로 계속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내는 상황의 정화였다. 그래서 냉혹한 논리로 철저하게 과거의 규범을 부정하는 방법론으로서의 회화의 현대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전통규범에 대한 역사적 해체행위로서의 행위의 역사가 바로 현대미술의 역사로 보면 된다고 주장한다. 양파를 까듯이 한 겹 한 겹 과거의 흔적을 자신들의 예술작업 속에서 지워 버리는 작업들이 곧 우리가 아는 역사적으로 순서적으로 나오는 여러 가지 전위 예술 양식으로 보면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일련의 역사적 해체행위로서의 현대 예술의 한 양상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 시점, 즉 약 1950년대와 60년대에 나온 것이 현대주의회화로서의 모노크롬회화였던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 해체행위로서의 전위 혹은 현대미술이 궁극적으로는 서구회화를 그 마지막, 죽음으로 몰고 가는 역사적 행진 속에 나름대로의 필연성을 갖고 나타나는 양식이므로, 이런 특별한 서구현대미술의 역사적 진화논리 밖에서는 단색화(모노크롬화)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개념인 것이다.

즉 서양인들의 고유한 (서구)역사적 경험 속에서만 나타나는 일련의 역사적인 상황에서만 나올 수 있는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예술경향에 불과한 것인데, 그 역사의 외부로부터 접근하는 동양의 화가들이 하는 단색화는 본질적으로 서구문명이 처한 그래서 서구의 예술도 함께 처한 역사적인 상황인식이 결여되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서구문화역사의 인문학적 교육이 부족한 대다수 동양의 화가들은 서구에서 그 때 그 때 나타나는 새로운 현대주의 또는 전위예술의 경향을 가장 진보된 형태의 예술규범인 것으로 착각하고, 마치 과학과 기술 선진국에 가서 첨단 지식과 기술을 배워 따라잡으려는 태도로 서구의 그때 그때의 예술경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마치 한국인이 영어를 배우듯이, 당대의 서구 전위예술의 경향을 배우려고 했으니, 그것은 지적인 오류를 범하면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스스로 형성하지 못하고, 서구의 아류 예술작업이나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 거의 전부였다. 그러니 서구에서는 모노크롬화가 잠깐 나타났다가는 살아지는 것을, 동양에서는 꾸역꾸역 계속해서 모노크롬회화를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이 의아스럽게 보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대부분의 한국과 일본의 서구현대주의 미술에 편입된 서양화가로서의 길을 걷는 작가들은 솔직히 이류 단색화작가들일 뿐이다. 즉, 서양의 아류를 못 벗어난 그래서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한 예술가연하는 예술가들. 그들은 자기들은 동양적 어떤 것을 서양적 회화양식에 추가하여 동양적이고 동시에 서양적인 한국식 현대회화를 창조해 냈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얼마나 수긍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소수의 작가들은 오히려 대다수의 서양아류작가 와 함께 도매금에 넘어가는 피해를 보아왔다.
이 소수의 작가들의 작품은 단색화가로 알려져서는 아니 된다. 이들은 서양적 아류의 한국적 현대화로서의 단색화가들이 아니다. 이우환식의 철학적으로 제대로 사유 되지 않은 경도학파의 禪 哲學에 기생하는 억지 담론으로는 제대로 이들의 예술적 성취의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 이우환의 모노화 이론의 허구성을 직시하고 새로운 그리고 좀 더 철학적으로 논리 정연한 그래서 국제적으로 설득력 있는 담론을 제시해야만 국제미술시장에 새로운 상품으로 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담론으로 필자는 ‘담화’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다. (지난 8월 싱가포르 현대미술관 전시에서 ‘한국에서 온 담화’ 전시라는 이름으로 여덟 명의 한국 작가들을 소개한 바 있는 데, 그 전시 도록 글에서 필자는 담화에 대한 담론을 처음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지금까지 한국화단에서 형성한 한국근대미술사의 맥락을 제대로 점검하고 새로운 담화의 계보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박서보와 이우환이 아니라 이응로와 윤형근이야 말로 서양현대화의 아류가 아닌 진정한 한국적 현대화로서 담화라는 새로운 미술경향을 개척했다고 보는 것이다.
김택상은 바로 그 “담화’작가로서 윤형근을 계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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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담화 작가로서 김택상 회화의 본질

얼핏 보면, 김택상의 작품들은 Optical Art 의 20세기 최고의 대가 Joseph Albers의 “Homage to Square” 연작들을 연상시키고 또 독일의 색채화의 대가인 Gotthard Graubner의 작품들도 연상시킨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고 따져 보면, 김택상의 작품들은 완전히 다른 예술세계에 속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앞서 언급한 두 서구 거장들의 작품들이 아름답지만 쇠락해가는 쓸쓸함이 배어 있는 (Bittersweet함의) 반면에 김작가의 작품들은 생명력으로 충만한 미래지향적인 예술의 지평을 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김작가의 “숨 빛”이라는 이름하의 연작 들 하나 하나를 자세히 응시해 보라. 그러면, 이 작품들은 그라우브너의 작품들처럼 색채의 작품이 아니라 ‘빛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색은 어떤 물체에서 반사되는 빛의 파장이 우리 눈에 인식되는 것이다. 다양한 색의 페인트, 색종이 등등이 바로 그것들인데, 그것은 표면 색이다.
반면에 빛의 색, 또는 빛깔은 투명하게 계속 움직이는 빛의 율동이다.
김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미묘한 빛깔의 빛이 캔버스 에서 배어 나오는 듯 해서 마치 빛이 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작품들 중 어떤 것에서는 마치 그 받침대 (즉 캔버스)의 물질성이 비물질화 된 것 같은 느낌도 준다. 그래서 분명히 벽에 걸려 있는 작품인데, 마치 작품의 뒤에서 또는 그 안에서, 즉 작품의 내면에서부터 빛의 꾸러미가 캔버스의 네모난 공간으로부터 살며시 발광되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안으로부터 조용히 배어 나오는 빛, 그것은 어떤 신비스러움을 느끼게 해준다. 이런 비유는 어떨까.
오후 늦게 이태리 산골 마을의 성당엘 들어갔다고 가정해보라. 아무도 없는 정적 속에, 높은 벽의 상층부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소리 없이 쏟아져 들어오며 연출하는 어떤 경건함. 김작가의 ‘숨 빛’ 작품들은 바로 그런 숨쉬는듯한 ‘빛의 결’들을 정교하고 섬세하게 캔버스 위에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즉, 조셉알버스는 기술적인 눈속임으로 유사한 일류젼을 그의 캔버스 위에 그렸고, 그라우브너는 입방체를 만들고 색으로 그렸지만, 김작가가 그의 캔버스 위에 만들어낸 ‘숨 빛’은 안으로부터 배어나오며 공명하는, 진짜 빛들이 숨을 쉬는, 생기 있는 빛의 발광체라는 것이다. 색채로 빛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빛들이 그 작품 속에서 배어 나와 공명하는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김작가는 그가 만나는 재료의 물성을 절대적으로 존중한다. 그는 재료들이 시간 속에서 만들어내는 인연들을 소중하게 따라간다. 물, 바람, 중력, 시간의 어우러짐이 그것인데, 그는 그 인연들이 어우러지는 장(site, 場)으로서 스밈이 가능한 캔버스를 선택했다. 그 캔버스는 동양수묵화의 재료인 화선지와 같이 어느 정도의 스밈이 가능한 것이다. 그는 페인팅에 물을 주로 쓰는데, 색의 기미를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극소량의 물감만을 물에 희석하여 사용한다. 그리고 그가 고안한 물을 담아 둘 수 있는 틀에 물감을 희석한 물을 부어놓고 오랜 시간 동안 캔버스표면에 스미듯 침전시킨다. 침전이 다되면 물을 빼고 캔버스 천을 벽에 걸어 말리는 것으로 한번의 인연사이클이 끝나는데, 이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캔버스표면에는 엷고 얇은 다양한 층(Layer)들이 겹겹이 스미고 쌓이게 된다.
이런 층 쌓기는 매번 새로운 층을 올릴 때 마다 새로운 틈새(그 사이)가 생긴다, 이런 조그만 틈새들이 계속 생성되면서, 결과적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빛이 배어 나오는 모습이 저절로 연출되어 나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복잡하고 다층적인 다양한 틈새들이 만들어져 층의 틈새들끼리 평면적으로 그리고 수직적으로 관계성 (Configuration)을 만든다. 그리고 그 관계성의 기하학은 각 작품마다 독특한 빛의 발광 효과를 스스로 연출해 내는 것이다. (만일 작가가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일안료를 사용했더라면, 층은 계속 두껍게 쌓여 올라갈 것이고 그 안료의 색감은 계속 더 진하게 또는 어둡게 될 것이다.)
수 없는 반복과 매 반복 시의 조그만 차이가 쌓이면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프랙탈기하학(Fractal Geometry)이다. 이런 새 기하학이 발견된 것은 불과 50년이 채 안되었다. 즉, 김작가의 빛의 회화는 이런 새 기하학의 이론 속에서 제대로 설명 가능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작가는 어떻게 알버스나 그라우브너와는 확연하게 다른 방법과 예술이념으로 그런 ‘숨쉬는 빛깔’의 공간연출을 하였는가 이다. 김작가의 이러한 예술적 성취는 바로 서구식 예술철학이나 회화적 방법론과의 근본적인 차이로부터 기인한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점이 왜 김택상 작가의 `숨 빛’작업이 서구 대가들의 작품에 비해 더 생기 있고 미래 지향적인 가를 가름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3]서구와 비 서구의 문화패러다임간의 Potential Incommensurability
Francois Jullien은 그의 저서 The Impossible Nude에서 왜 전통적 중국사유에서는 “미학”이라는 개념이 없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데, 그 이유 중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전통 중국사유에서는 “형이상학 (Metaphysics)”를 배척하는 세계관을 수립하였기 때문이었다. 전통중국 사유의 패러다임이 서구 사유의 패러다임과 그렇게 서로 달랐다면, 우리는 정말 개념 하나 하나에 대한 지극히 조심스런 배려가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면, 똑 같은 “질량(mass)”과 “에너지(energy)”라는 단어들이 뉴톤의 과학적 패러다임 속에의 의미와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패러다임 속에서의 의미는 완전히 다른 것처럼, “현대주의” 또는 “단색화”라는 단어가 서구의 사유의 패러다임 속에서와 동양사유의 패러다임 속에서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예술계에서는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금세기의 현대 한국작가들처럼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에 의거한 예술전개의 필요성과 서구중심부의 화려한 현대서구적 예술세계의 유혹의 사이에 양 다리를 걸치고 있는 그래서 아주 독특한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어가는 비서구, 제3계 출신 예술가들에 대한 해석에서는 정말 조심스런 개념적 정리가 요구되고 있다. 이런 경우는 이미 한국의 윤형근이나 박서보 같은 작가들의 경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었다. 필자는 이미 이 두 한국작가들의 작품론에서 이런 지적을 시작하였다. 구태의연한 서구의 미술담론이나 무작정의 전통동양예술화법의 담론만으로 이런 작가들을 이해하기는 힘들고, 계속 왜곡되어 제 멋대로 해석되어 갈 수도 있다는 안타까움이 있어서, 이렇게 작정하고 애매하게 신비에 휩싸인 알맹이 없는 담론들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기초 개념적인 그리고 담론차원에서의 문제를 정리하기 전에는, 앞으로도 계속 동양계 예술가들은 서구현대예술의 아류 정도로 취급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동양계 작가들은 바로 그런 아류이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자기만의 독특한, 서구에서도 전통 동양에서도 하지 못하던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어 가는 동양계 작가들은 바로 이런 담론적인 혼돈 속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할 여지가 너무나 많은 것이 현실이다.

다시 김택상의 작품들로 되 돌아가보자. 김작가의 ‘숨 빛’ 연작을 보면 마치 캔버스 뒤에서 또는 안에서, 어떤 내면의 빛 같은 것이 배어 나오고 있다. 그래서 어떤 신비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그래서 어떤 추월적인 Sublime의 미학적 성취로 간주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특히 최근의 작품들에서 그만의 독창적인 예술성이 바로 이 내면의 빛처럼 보이는 신비한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처럼 신비하게 보이는 내면의 빛 때문에 이 화가는 초월적(Transcendent)인 sublime의 미학을 추구하는 것으로 평가 받을 소지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오류를 범하는 것일 뿐이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역경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形而上者谓之道,形而下者谓之器。-《易经》여기에 나오는 形而上에서 중국예술비평가들은 metaphysics라는 개념을 유도한다고 하는 데, 이런 영어로의 번역이 틀린 것임에 틀림이 없으니, 그 이유는 간단하다. 위의 문장은 두 개의 구절로 구성되었고, 앞 구절의 上과 뒤 구절의 下는 분명히 논리적인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태여 앞문장의 形而上을 metahysics로 번역하려면, 形而下는 앞 구절의 metaphysics와 논리적으로 연계되어 어떤 영어의 단어를 쓸 것인가를 배려하면서 결정지어야만 했을 것이다. 도대체 形而下의 번역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아마도 上과 下의 논리적 연관성을 보존하는 metaphysics와 대비되는 영어단어를 찾지 못할 것이다.

形은 영어로는 shape이나 form으로 번역할 수 있는 데, shape가 있다는 것은 그 물체가 可視的 즉 visible하다는 말이다. 반면에 形이 없다는 것은 비 가시(非 可視) 즉 invisible 하다는 말이다. 이런 접합에 대한 이론이 고대 동양의 우주학 이론에 엄연히 설명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동양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해야만 할 것이다. 중화라는 동양의 거대한 제국이 형성되기 이전에도 동아시아 대륙에는 세련된 문명이 있었고, 그들은 나름대로의 철학과 이념과 일관성 있는 우주관이 있었다. 즉, 공자와 노자가 있기 전에 이미, 좀 더 시원적인 동양고전이 있었고, 거기에 기록된 시원적인 사상은 그 동안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망각되어 왔었다. 그 중에 하나가 영해 박씨들이 秘專으로 보존하여 내려온 ‘부도지’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 매월당 김시습의 징심록 추기는 영해 박씨 세감에 엄연히 나와있는 기록이고, 징심록의 한 중요한 부분인 부도지는 이미 출판되어있는 상황이다.) 부도지에 나와 있는 이론을 조금만 더 부연 설명하여 보자.

구약성서에서도 창세기 편에서 모든 물질 체와 생명체는 빛(Light)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나와있는데, 구약성서보다 훨씬 시간적으로 먼저였던 동양 最古의 시원사상이 담긴 부도지(符都誌)에서도 처음엔 아무 것도 없는 텅 빔(emptiness; 무 無) 에 빛(光)이 채워지면서, 빛 알갱이의 파장이 비가시적인 (invisible)한 無(vacuum)를 채운 파장(즉, 서로를 상쇄하는 electron과 positron)으로 형성된 potential force field에 밖으로부터의 힘(勢)을 가하여, 공명(resonance)을 일으키면서, 즉 결합되면서, 형체(shape또는 form)가 있는 개체들을 만들어 낸다는 이론이다. 이렇게 물질개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파장이 동양철학에서는 氣라는 파장운동(wave motion)인 것이다. 부도지가 들어 있는 징심록의 저자인 신라초기 말의 박제상의 후손인 박현씨는 이런 과정을 빛과 닷 의 결합의 결과로 설명한다. (註: 모올도뷔 2001년3월호)
전통동양 서예가 한자라는 기하학적인 형체가 이루는 배치(configuration)속에 내재된 氣勢의 potential force field에 붓의 劃의 운동성에 의해 새로운 파장을 일으켜 새로운 그리고 독특한 氣勢를 이루는 기세의 예술이듯이, 김택상 작가는 아주 독창적으로 물체 성(materiality)이 있는 채색필드(color-field)로서의 Potential Force Field (색을 이용한 氣勢의 형성)를 형성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그 내재적 potential force field (이것은 가시적으로는 그냥 Color Field로 나타나지만 그 내면에는 비가시적인 qi-energy field가 형성된 것이다)의 완전히 새로운 비가시적이지만 실체가 있는 새로운 운동성의 氣勢를 그 캔버스라는 site(場)에 창조해 낸 것이다. 그래서 내면의 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인다기 보다는 비가시적이지만 실체가 있는 운동성을 느끼게 되어, 그의 작품에서는 음악성을 느끼고 내면의 빛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김택상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내면의 빛이나 음악성이 무슨 신비함에 둘러싸인 초월적인 류의 그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실체가 있어서 자연에 있는 자연적인 원료 (from natural sources) 에서 나오는 (emanate)하는 effect(효과)들이기에, 김택상 작품의 독특한 빛이나 음악성은 초월적(transcendence)인 것도 신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Francois Jullien박사는 중국 송 대의 천재시인으로 알려진 소동파의 시가 주는 효과와 유사한 시적 효과를 주는 불란서의 전위 시인으로 명성을 떨친 Verlain을 이렇게 비유했다. 소동파와 베를렝은 둘 다 어떤 의연함, 고요함 등의 시적 효과를 나타내는 시작을 했지만, 그런 유사한 시적 효과(poetic effects)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베를렝의 경우, 서구문명의 석양에 어떤 허무적인 제스춰로서의 그것일 뿐인 데 반해, 소동파의 시에서 나오는 유사한 시적 효과는 중국적, 동양적 세계관을 세워주는 철학적, 도덕적, 정신적 기초가 있는 즉 탄탄한 정신적 근거가 있는 시작이요 추구라는 것이다. 벨를렝의 시는 이제는 철학적 도덕적 정신적 기반이 와해되어 무정부적 상태의 허무주의에서 어떤 탈 출구도 찾을 수 없는 절망 속에서의 자포자기적인 고요함이지 진정한 의연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 소동파의 그것은 실체가 있는 그 문명에서 최고의 덕목으로 꼽는 세계를 자연을 바라보는 자세, 즉 수행의 결과로 나오는 실체가 있는 의연함이지, resignation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얼마나 하늘과 땅과 같은 차이란 말인가? 표면적으로 유사한 시적 효과일 망정. . . 그렇기에 무의미한(Superficial) 동서의 비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Hegemonic Center로의 서구문명이 석양이고, 새로운 세계체제의 개편이 이루어지는 지금 같은 역사적인 과도기에,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좀 더 정확한 개념과 담론의 정비가 절실한 것이다.

[4] 명상적 회화로서의 김택상의 담화

역사, 사회 현상으로서 분명한 것은 서구의 소위 말하는 후기 현대인들 사이에서는 지금에 와서 동양의 명상 세계에 무한한 동경과 관심을 갖고 스스로 그 세계에 빠지고 수행을 한다. 그 후기 현대인으로 불릴 수 있는 대부분의 서구의 교육 잘 받은 지식인 교양인들은 작금의 서구 중심부의 현대, 후기현대 또는 전위라는 이름의 서구 예술을 외면한다. 관심 밖이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서구의 현대, 후기현대, 전위 예술은 이미 끝장나서, 이제는 허무주의적인 공허한 제스춰나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 본연의 정신성, 영성 추구[註 1: 영어로는 ‘human spirituality’로 쓰이는 용어를 한글로의 적당한 번역이 없다. 우선 영성이라 쓰기로 한다]의 표현이 예술의 본질이거늘, 이런 예술 본연의 추구를 망각하고 허무주의적인 지적 사기극이나 벌리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런 진단은 이미 1968년에 하버드의 유명한 예술철학 및 미학자인 스탠리 카벨교수가 내린바 있다. 그 한참 후에 콜럼비아대학의 아서단토 교수가 ‘예술의 종말’이란 개념을 들고 나왔고.) 사실은 이미 18세기에 현대미학의 창시자라고 부를만한 칸트까지도, 만년엔 예술과 인간 정신성추구의 관계에 대해 그를 위대한 철학자로 만든 그가 장년기에 쓴 책들에서 나오는 이론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정신성과 영성을 강조하는 책을 썼었다. (註2: Lucien Goldmann이라는 프랑스에서 활동한 학자는 학문도 역시 선택적이어서 칸트의 철학도 자기 학파들의 이념에 가까운 것만 선택적으로 취사 선택하여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Goldmann의 박사논문이었던 IMMANUEL KANT란 책에서 이런 부분이 잘 정리되어있다.)

만년 칸트의 예술관은 동양의 전통예술이 추구하던 자연이나 우주와의 합일 추구가 바로 인간의 정신성, 영성의 추구이고 바로 그런 추구의 표현이 예술이라고 썼었다. 칸트가 여기서 말하는 합일이 바로 장자가 말하는 제물론 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김택상 작가는 바로 자신의 예술행위자체가 수행이요 명상의 방법이므로, 그의 회화작품들은, 바로 그런 명상의 세계를 동경하는 수많은 서구의 예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교양인들이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필자는 확신한다. 장자의 나비와 칸트의 예술론의 정신적 유사성을 논하기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만년의 칸트의 예술철학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다음과 같은 칸트의 말을 인용하여 시작하자.

칸트가 “예술은 인간의 공동체와의 완벽한 합일을 추구하는 인간 본연의 의지의 표현이고, 바로 그런 추구가 바로 정신성-영성의 인간으로서의 존재(삶)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전제 조건”이란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註 3: Immanuel Kant, Dream of a Visionary에서 “Art is an expression of the very basic human aspiration towards a perfect human community, and this aspiration is the ground for the possibility of human spirituality.”) 우선, 위의 긴 문장의 첫 번째 반에 나오는 “공동체”라는 단어는 작은 의미의 인간사회나 마을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전인류를 그리고 전인류를 포함하는 더 크고 넓은 우주, 또는 어떤 모든 것의 “전체”를 의미한다. 공동체는 어떤 연결고리에 의한 묶어짐을 의미한다. 인간은 사실은 우주의 한 조각에 불과하고, 우주의 한 조그만 부분으로 또는 자연을 벗어나서는 살수 없는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자연의 다른 모든 것과 연결고리를 이루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서로 맞물려 고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곧 장자가 말하는 “나비의 꿈”에서 나오는 재물론(齋物論)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주와의 연결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너무 거대한 철학적인 각성일 필요도 없다, 그냥 아주 보잘것없는 하나의 조약돌이 강가에서 우연히 발끝에 차였는데, 갑자기 그 조약돌을 눈 여겨 보는 계기되면서, 무언가 새로운 무엇을 느끼게 되었다면,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또는 먼 옛날의 기억이 떠올려지면서, 잊었던 어떤 인연이 회상되었다든지, 그런 순간은 의외로 어떤 환희와 놀라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예상치 않았던 순간적인 어떤 발견으로 오는 기쁨은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끙끙거린 결과로 오는 것도 아니고, 어떤 책에서 배운 공식을 대비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결과를 내기 위한 목적을 위한 행위의 결과로서 오는 것도 아니고, 너무 뜻 밖의 조그만 일상의 보잘것없는 (강변 모래사장의 조약돌 같은) 주변의 어떤 것과의 만남 속에서 나오는 것으로, 가장 순수한 차원에서의 조그만 깨달음의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순수한 조그마한 즐거움 또는 놀라운 환희를 내가 좋아하는 배려해주고 싶은 주변의 다른 사람 누구한테 “이걸 봐. 재미있지? 어때?” 이런 식으로 가장 인간적으로 말을 거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술이고, 이런 조그만 일상의 교감 속에서 어떤 합일을 느끼면, 그 합일은 비록 순간적이지만, 어떤 조그만 뿌듯함까지 느끼게 해주는 것이니, 바로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인간적인 정신적, 영적 충만함을 경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거대한 담론을 통한 어떤 위대한 지혜를 얻어서가 아니다. 어떤 신이 내리는 거룩한 무엇일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냥, 아주 조그맣게 평범한 깨달음이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노력이나 추구의 대가도 아니다. 그냥 우연하게, 뜻밖에 찾아 온 순간적인 발견이요 조그만 기쁨일 뿐이다. 산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아주 보잘것없는 조그만 들 풀이 그런 순간을 제시하여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지하철 반대편에 앉아 있는 노인이 신문을 보다, 혼자서 미소 짓는 얼굴을 훔쳐보는 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일상을 상당부분 기계처럼 어떤 규약이나 법칙 또는 규율에 얽매여 사유하고 행동한다. 상당 부분 계산적일 수 밖에 없다. 생존하자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심리학자들은 어떤 미리 머리 속에 인스톨되어있는 인지의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면 우리의 밖에 있는 어떤 사물도 제대로 눈으로 보고 듣고 인식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만큼 본다는 말도 있는 것이다. 이런 틀에 박힌 삶, 틀에 박힌 사유와 인식에서 어느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해방되어, 보게 되는 어떤 것은 경이로움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여태까지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으니, 기적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갖 틀로 무장되어 살아가는 우리 인간이 그런 틀에서 해방될 때,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틀에서의 순간적인 해방,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마로 “마음 비움”인 것이다. 결국은 마음이란 것이 온갖 인위적으로 구성된 소프트웨어 인스톨레이션이 아닌가?

孔子의 大學에 知止定靜이란 문구가 있다. 지금 우리의 문맥상 중요한 개념은 靜이다. 모든 私的인 욕망, 이해관계에 물려있으면 고요해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모든 틀, 그 동안 머릿속에 인스톨된 여러 가지 소프트웨어가 콘트롤하는 틀에서 벗어남으로 생기는 고요함일 것이다. 그래서 靜 또는 寂寥의 상태를 이룩할 때, 安, 즉 제 모습을 드러내, 慮, 즉 카테고리의 경계와 다른 모든 한계를 넘는 우주적인 사고를 하여 우주와 합일을 이루어 得道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동양적 사고에 칸트의 만년의 예술철학 (美學科 에서 교과서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숨겨놓았던)이 얼마나 가까이 왔는가?

모든 일상의 욕망이나 상념에서 벗어난 상태에서의 조그만 깨달음은 사실 아주 조그만 순간적인 득도라고 불러도 무관하지 않을까? 이런 조그만 경이로움 들의 기적! 우리 보통 인간은 그런 경이로움이 일어날 때, 주위의 다른 누구와 공유하고 싶어하게 된다. 그런 공유를 위해서, 우리는 우정의 손을 내 미는 것이다. “난 이렇게 보았는데, 너는?” 아주 소박한 그리고 아무런 가식도 목적도 없는 너무도 인간적인 손길이다. 두 사람이상이 어떤 공유가 가능할 때, 이미 공동체는 생겨난 것이다. 순간적이고 조그마한 만남이지만, 정신적, 영적 충만함을 이루게 되고, 이런 것을 넓은 의미의 예술이라고 불러 무방할 것이다. 만년의 칸트는 오히려 이런 소박한 그리고 가장 순수한 순간으로 끝나버릴 이벤트의 예술을 더 선호했던 것이다. 영웅적이고 천재적인 거대한 재현적 제스춰로서의 큰 예술이 아니라.

老子의 도덕경의 첫 구절은 道可道 非可道 名可名 非常名 이다.
노자는 도덕경의 제일 첫 마디로 어떤 다른 개념을 이용해서도 어떤 언어상의 방법으로도 道를 설명 할 수는 없다고 못박고 있다. 인간의 언어행위는 사회적 행위로서 인간과 인간과의 소통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암묵적인 사회적인 규범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 규범은 결국의 어떤 문법의 체제일 것이다. 이런 인위적인 틀을 프리즘 삼아, 현실을 인식하게 되면, 그렇게 인식한 현실은 이미 왜곡된 현실일 수밖에 없으니, 그 이유는, 어떤 틀이든 ‘틀’의 정의상, 현실의 변화 무쌍하고 복잡 다양한 측면의 많은 부분은 인식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주장은 20세기 전반부에 가장 뛰어난 두 명의 철학자 중의 하나로 아카데믹한 철학 계에서 일반적으로 자리매김하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에 의해서도 주장되었다.
“What cannot be said can only be shown.”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것을 김택상 작가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되새겨 회화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면 어떠할까? 그리고 그런 시도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道를 언어행위의 방법으로 말로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언어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 전제 되는 ‘틀’ 때문인 것이다. 틀을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비유하는 것이 설명상 적절할 것 같다. 인식의 틀, 즉 인식을 가능케 하는 어떤 소프트웨어가 미리 인스톨되어 있지 않으면 컴퓨터는 작동하지 못한다. 이렇게 인간의 인식은 어떤 인식의 틀(Perceptual Schemata)를 필요로 하지만, 여기엔 이런 한계가 있다. 그 전제된, 미리 인스톨된 인식의 틀은 다른 가능한 인식, 즉 다른 틀을 이용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어떤 한 순간엔 하나의 틀만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틀은 우리의 눈 역할을 해주지만, 동시에 다른 인식(‘봄’)의 가능성을 배제시킨다.
현대 철학에서는 이런 패러독스를 Aspect Blindness라고 부른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예로 “토끼와 오리”의 그림을 든다. 즉, 같은 그림이지만, 이것을 오리로 볼 땐, 동시에 이것을 토끼로 볼 수는 없다. 즉, 그 그림의 한 측면을 보게 되면, 다른 측면에 대해선 눈멀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틀(소프트웨어)을 배워 우리의 머리 속에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습관이라는 이름으로 주입(인스톨)시켜, 이런 여러 틀들이 우리의 인식과 행동의 연산 법이 된다. 우리는 항상 코끼리의 한 다리만, 아니면 꼬리만 만지며 코끼리의 전체는 못 보는 운명일가? 老子는 분명히 만일 누가 道를 말로서 표현한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道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코끼리도 道도 영원히 인간 인식의 밖이란 말인가?

언어적으론 설명도 정의도 안 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보여질 수 있는 것일까? (What cannot be said can only be shown.) 이런 생각의 추리는 어떨까? 즉, 인간의 인식은 어떤 틀들의 체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바로 그런 전제 조건의 필요 때문에 현실의 전체를 볼 수 없는 것이라면, 인간이 일상 생활 속에서의 인식을 위해 주입한 모든 인식의 그리고 가치의 틀들을 놓아버릴 수 있다면, 그 땐 어떤 것을 볼 수 있을까? 그땐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그게 바로 마음을 비워서 空의 상태로 가보자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공의 상태는 정(靜)의 상태일 수 밖에 없다. 왜, 모든 틀에서 벗어났을 때, 그것은 바로 모든 상념, 모든 사적인 욕망에서 벗어난 생태이니 감정적으로 마음이 고요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고요한 정의 상태로 가는 것, 그러면서 마음을 비워 공으로 가는 길, 그것이 명상이다. 그러면 공개념에 대해서 잠깐 정리해 보자. 조용한 정의 상태로 가는 것을 또 다른 한자 淡으로 표현하면 더 쉽게 설명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 중에 “담담하다” 또는 “담백하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담(淡)은 비워서 空이 되어서 담담하거나 고요한 靜의 상태에 온 것이 아니라, 가라앉아서, 침전되어 담담한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장맛비가 온 후에 마을의 연못은 물결이 일고 별의 별것이 다 수면 위에 떠 올라 연못의 밑 바닥이 안 보인다. 그러나 얼마 후, 바람이 잠잠해지고, 일던 물결 마저 사라져 수면이 마치 유리처럼 잔잔해지면, 그 동안 수면 위에 표류하던 것들도 모두 바닥에 가라앉아, 연못의 수면은 유리알처럼 투명해져서 연못의 밑바닥까지 다 선명하게 보이게 된다. 연못이 정화되고 고요해져서 투명함과 선명함이 가능해진 것이다. 마찬 가지로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경우에도, 여러 잡생각이나 다른 상념들로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면 마음이 깨끗하고 투명한 의식을 갖출 수가 없는 것이다. 정화된 순수함의 마음으로 침전되어 있을 때만, 그 담담함 속에서 우주의 여러 기운과 대응하고 선명하게 의식할 수 있는 직관이 생긴다.

담이나 정의 상태는 공의 상태, 특히 절대 공의 상태와는 거리가 먼 개념이다.
바로 여기에서 일본식 선사상이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절대 공의 상태에서만 절대적 진리를 접할 수 있다는 경도학파의 이론을 이우환은 그대로 직수입하여 자신의 모노화 담론에 차용하는 데, 그것은 선에 대한 몰이해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예정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달마 선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선불교를 창시하였고 그것이 중국에서 한국반도로 그리고 한국에서 일본열도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진정하고 순수한 선불교 사상이 왜곡되어 기형적 선이 되어, 1920년대엔 경도학파의 선 철학은 일본군국주의 이념을 제공하게 되었다. 일본식 사무라이 젠 이라는 것은 마치 일본식군국주의를 위해 살신성인하는 일본사무라이로서의 전사들을 양성하는 더도 없이 좋은 이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일본식 선사상이 2차 대전 이후 미국정부의 조력으로 마치 동양선사상의 대표자격으로 세계에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었다. 근대 일본역사는 하버드교수출신 미국지식인들이 참여하여 미국과 일본의 공동의 전략적 이해관계의 계산법에 의해 조작되어 정통역사교사로 서술되었다는 것이 지난 10여 년 사이에 미국정부비밀문서들이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밝혀져서 학자들에 의해 연구 출판되고 있다. 일본의 창문을 통해 구성된 동아시아의 국제적 이해는 이제 수정되고 좀더 진실과 사실에 가까운 동양의 전통사상과 예술과 학문이 밝혀지고 그려져야 할 것이다.
필자는 김택상작가와 같은 일련의 담화작가들의 창작활동도 바로 그런 역사 바로 잡기, 자연과 세계 바로 보기를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은 내면에 항상 내재적 잠재성으로서 보존하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갖고 있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간 본연의 빛을 품고 있다.
김택상의 ‘숨 빛’ 작업은 빛의 회화로서 우리 시대에 아주 시의 적절한 빛의 인간성을 복본 하는 계기가 되는 명상의 회화라 할 수 있다.

Written by Kai Hong, [Copyright©2013 by Kai Hong]